덜그럭 대는, 링거 주사를 매단 스탠드를 끌고 오갈 때마다 병상에 앉아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항시 술에 취한 것처럼 불그락한 얼굴빛이 인상적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굳게 다문 입술이 눈에 띄었다. 입원 첫날 마주친 그의 처는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염려하는 듯했다. 그에게 딱 맞는 사이즈의 슬리퍼를 사기 위해 1층 매점을 두 번이나 오갔다.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하루에 서너 번 전화를 해 모두의 단잠을 깨우곤 했다. 부부가 나누는 짤막한 대화를 듣건대 그녀 또한 몸이 성치 않았다. 그는 몇 번이나 내일 꼭 병원에 들르라고 그녀를 채근했다. 그녀는 확답을 하지 않고 말을 뱅뱅 돌리다가 마지못해 알았다고, 당신 몸이나 잘 간수하라고 덧붙였다.
얼마 후 그는 혼자가 되었다. 그의 스타일은 확고했다. 간호사를 부를 때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는 여기가 종합 병원이 아닌, 자신이 즐겨 찾는 단골 술집이나 룸살롱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물이 없었다. 조금의 어색함 없이 자연스러웠다.
참다못한 어느 간호사는 발끈하여 "저희 아가씨 아니에요. 간호사라고 부르세요."라고 몇 번이나 지적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좀체 바뀌지 않았다.
담당 간호사가 내일 수술을 위해 관장을 해야 한다고 옆으로 돌아누우라 하자 그는 아, 싫은데.. 귀찮아하며 토를 달았다. 간호사가 뭘 하라 시키면 그는 뭐요? 하고 딴 소리를 하거나 못 들은 척하기 일쑤였다.
그가 입실한 6110호 병실은 요주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지 오래였고, 그의 불평불만은 점차 최고조에 달했다. 그와 간호조무사들의 갈등이 절정에 달할 즈음, 결국 첫날부터 사달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엿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최근 대장암을 진단받아 복강경 수술을 통해 대장의 일부를 절제 예정이었다. 병실 창 밖이 어둑해질 즈음, 어느 간호사가 다가와 그의 잠을 깨웠다.
- 아, 귀찮아. 벌써 사흘 째야.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거기다 잠도 못 자게 하고.. 못 살겠네.
- 귀찮은 거 하나도 없어요. 이 크림 짜서 골고루 바르고 5분 정도 있다가 휴지로 닦아내면 끝. 아셨죠?
잠시 커튼 너머가 정적에 잠겼다가 급기야 고성이 터졌다.
- 안 해, 안 한다고! 병원 참 맘에 안 드네. 내가 말이지. 몸에 바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야. 진짜 싫다고!
조잡한 패턴의 커튼 너머에서 귀를 쫑긋 기울이던 난 확신했다. 그는 정말이지, 최악의 역대급 진상이자 개ㄸㄹㅇ임에 분명했다. OMG, 병실 완전 잘못 걸렸는데. 하필이면 저 시한폭탄이랑 같은 방에 입원하다니.. 이러다가 옆에 자리한 나한테 엄한 불똥 튀면 안 되는데.. 내일 수술을 앞두고 난 괜한 걱정이 피어올랐다.
역정을 내는 그의 옆에서 간호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이거 안 하시면 내일 수술 못 해요. 수술 부위에 털이 있으면 감염 우려가 있어서 위험하다고요.
- 내가 말이지. 여기 병원을 10년 넘게 다닌 사람이야. 이건 아니라고. 아무튼 난 못하겠으니까 알아서 해.
- 그럼 선생님, 주치의한테 제모 못 하겠다고, 수술 안 하겠다고 그대로 전할게요.
- 맘대로 해.
이후로도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다. 인내심에 바닥난 간호사는 결국 복도로 나와 아우, 열받아.. 하고 동료들에게 난감한 처지를 하소연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의 처는 이러한 비상 상황을 익히 예상했는지 때마침 전화를 했다. 요란한 벨 소리를 참다못해 난 몸을 일으켜 병실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아니 내가, 잘하고 있지.. 병원을 또 옮길 수는 없지. 알았어 알았다고.. 이번엔 수술받을 거니까 걱정 말라고. 당신 몸이나 챙겨. 드문드문한 통화 소리를 뒤로 하고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 덩그러니 놓인 티브이에서는 철 지난 예능이 흘러나왔다. 강풍에 위태롭게 휘어지는 창밖의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6110호 병실은 조용했다. 긴박했던 대치 상황은 정리된 것처럼 보였다. 그가 결국 자기 손으로 제모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어느 마음 넓은 간호사가 그의 제모를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찌했든 그는 우여곡절 끝에 수술 준비를 마쳤다.
다음 날, 그는 오후 4시가 지나도록 병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수술실로 실려간지 벌써 5시간이 지났다.
악성 종양이 자라난 결장과 직장 부위를 절제하고 나머지를 항문과 연결하는 수술은 결코 만만한 수술이 아니었다. 난 진작에 담낭 절제 수술을 마치고 침대에 누운 채 골골대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회복실에서 돌아왔다.
- 어이 추워. 아가씨, 왜 이리 아파?
서넛의 간호사와 조무사가 달려들어 그를 침대로 옮겼다. 그는 연거푸 아프다고 춥다고 간호사를 붙들었다. 그때마다 노란 액체가 담긴 진통제가 투여됐다. 그는 밀려오는 고통을 참지 못해 신음을 내뱉었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간호사를 찾았다. 호출을 위해 머리맡에 위치한 콜벨을 누르면 되지만 그는 밀려오는 통증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나 보다. 아가씨! 거침없는 그의 목소리가 터졌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병실도 회복 중이거나 위중한 환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간호조무사들은 그들을 돌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사장님!" 하고 호칭을 바꾸었다. 저 인간,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하는구나. 난 조용히 혼잣말을 삼키며 커튼 너머를 응시했다. 그는 몸을 뒤척이다 어우, 너무 아파!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저기요!" 애타는 목소리가 터졌다. 그는 애꿎은 폰을 만지작거리다 침대 한 켠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도 자주 전화하던 그의 처는 웬일인지 오늘 침묵을 지켰다. 그녀 또한 몸이 성치 않았기에 오늘 전담 병원에 들러야만 했으리라. 더 이상 그녀는 젊지 않았다. 지난날 그의 대책 없는 진상과 술주정을 받아주고, 온갖 사고를 칠 때마다 뒤치다꺼리를 도맡던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온전한 '혼자'였다. 욱하는 기질에 주책도 없지만 그는 멍청하지는 않았다. 생살을 찢는 극한 고통의 상황에서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잠시 후 "여기요! 선생님." 새된 음성이 들렸다. 이번에도 기척이 없자 그는 용기를 내었다.
"간호사님, 저 좀 봐주세요!" 이제야 제대로 호명을 한 그는 소리를 높였다. 근처를 지나던 수간호사가 그에게 다가와 닫힌 커튼을 열어젖혔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무통을 달아 드릴까?"
그는 왜 이리 아파, 하고 대답을 대신했다.
- 생살을 째는 수술을 했으니 당연 아프죠. 오늘만 넘기면 괜찮을 거예요.
- 그럴까? 너무 아픈데..
- 무통 달았으니까 못 견디겠으면 이거 누르세요. 한 번 누르면 이게 안 튀어나와요. 5분 정도 시간 지나면 다시 누를 수 있어요.
그제야 그는 복부를 칼날로 후비는 고통에서 벗어난 듯했다. 숨을 고른 후 간호사에게 회심의 한 마디를 던졌다.
- 고생하시네. 여기 간호사님들 다 고생해.
본래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인지 잠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반백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로서는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었다.
- 고생은 선생님이 더 하시지. 다음에는 애타게 부르지 말고 콜벨 눌러요. 아셨죠?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는 진상을 떨지 않았다. 6110호 병실은 다시 예전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떠들썩한 소동도, 일촉즉발 대치 상황도.. 모두 없던 일이 되었다.
수술을 집도한 주치의는 그에게 들러 동맥 경화가 심장에만 생기는 게 아니거든요, 하고 복부의 혈관 상태가 좋지 않다고 금연 금주를 권했다. 그는 마지못해 이제 끊어야죠, 하고 작게 속삭였다.
수술 다음 날 오전, 그는 몇몇 간호조무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를 걸어 다녔다. 장기 유착을 막기 위해 틈틈이 걸어야만 했다. 그는 3 바퀴 정도를 걷고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자신은 한창때 운동한 몸이라고, 7바퀴 정도는 거뜬히 돌 수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그러셔요, 시키는 운동을 이렇게 잘하면서 어제는 왜 그리 말을 안 들었대? 링거 스탠드를 끌고 따르는 조무사 이모님의 능청구가 돌아왔다. 그는 허참, 혀를 끌끌 차며 침대로 올라왔다. 리모컨을 조작해 모션 베드의 상단을 40도가량 높였다. 곧이어 익숙한 벨소리가 울렸다.
- 왜 이제 전화해? 병원에는 간 거야?
- 당신 수술 잘 받았어? 아까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구.
- 의사가 걱정 말래. 수술 잘 됐다고 하네.
- 어이구 다행이여. 하나뿐인 골방 영감, 저 세상 보내나 하고 한참 걱정했구먼.
- 이 사람 별 재수 없는 소리를 다 하네. 쓰잘데 없는 소리 말고 전화 끊어.
- 아무튼 난 별 이상 없응께. 몸조리 잘하고 퇴원 잘 허요.
- 알았으니 집 문단속 잘하고.. 며칠 있다가 돌아갈 테니 고생혀.
...
폰의 스피커 볼륨이 너무 커서 본의 아니게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셈이 되었다. 난 그가 회복하여 집에 무사히 돌아가기를 기원했다. 그는 강인했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확연했다. 솔직히 그는 그간 마주친 진상 중에 세 손가락에 꼽을 만큼 최악의 캐릭터였다. 허나 그는 마냥 미워하고 내칠 수만은 없는, 알고 보면 일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인물이었다.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 인간적인 매력이 어딘가 숨겨져 있기에 그의 막말과 억지에도 간호조무사들은 상처받지 않고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글 쓰는 입장에서도 그만큼 흥미롭고 다채로운 먹거리를 무심코 놓칠 수는 없었다. 운 좋게 바로 옆 자리로 찾아든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