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 몇 마리를 소소하게 기르고 있다. 반려 우렁이라 부르기도 뭐 하지만 어찌어찌 1년 넘게 그들을 보살폈다. 이쯤 되면 진지하게 자칭 우렁 집사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작년 초여름, 인터넷에서 구매한 토종 우렁이 몇을 반으로 자른 페트병에 조심조심 넣어 주었다. 솔과 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빠, 얘네들은 새끼도 낳고 오래오래 살겠지?"
난 조심스레 주변을 탐색하는 우렁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나눔 받은 왕우렁이 한 쌍을 기르다 차례로 아파트 뒤뜰 어딘가에 묻어준.. 아픈 기억이 있다. 홀로 남아 곡기를 끊고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숨을 거둔 마지막 왕우렁이. 그를 어느 나무 아래 묻어주고는 눈물을 쏟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솔과 연은 그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었고 오랜 시간 정성껏 보듬어 주고, 그들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세상을 떠난 외래종보다 토종 우렁이가 기르기 쉽다더니 웬걸 아니었다. 그들은 이빨이 약해 단단한 먹이는 감히 넘보지도 못했다. 덩치 큰 왕우렁이라면 거뜬히 해치울 만한 사과 껍질이나 토막 낸 오이도 그들은 조그만 이빨 자국 하나 남기지 못했다. 왜소한 체격의 토종 우렁이는 오랜 시간 물에 잠겨 흐물해진 상추를 즐겨 먹었다. 애정을 쏟는다고 텃밭에서 막 따온 싱싱하고 뻣뻣한 상추를 주면 곁에 웅크리고 앉아 지켜보기만 했다. 처음엔 답답하기만 했다. 먹음직한 진수성찬을 차려 주어도 이빨 다 빠진 꼬부랑 영감님처럼 씹지를 못하니.. 기르고 보살피는 우렁 집사의 마음이 성이 차겠는가? 토종 우렁이는 기다림과 인내를 요하는 이들이었다. 한나절 상추잎이 물에 불어 숨 죽은 물풀처럼 물러질 정도가 되어야 그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적당히 물러진 적상추 위에 올라타 연거푸 구멍을 내는 그들은 촉수를 길게 내밀고 입을 뻐끔거린다. 수조 너머 검은 눈동자를 깜박이는 우렁 집사에게 보내는.. 나름 흡족하다는 땡큐 사인이다.
상추잎에 철제 클립을 물려 수면 아래 가라앉도록 먹이를 줍니다. 우렁이는 수질에 민감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먹이를 주지 않도록 합니다. 우렁 집사.. 은근히 까다롭습니다.
배가 부른 우렁이들은 본업으로 돌아간다. 본업보다는 천직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들은 입을 뻐끔대며 투명한 페트병을 스키를 타고 활강하듯 구석구석 미끄러진다. 우렁이는 수조의 '청소부'라는 별칭답게.. 벽에 붙은 이끼와 물때 등 이물질을 샅샅이 먹어치운다. 그들은 더러움을 참을 수 없다. 본능적으로 혼탁함을 거부한다. 온갖 열대어들이 헤엄치는 대형 수조를 자주 청소할 자신이 없다면 우렁이들을 적극 고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전문 청소 용병들은 끼니만 제공된다면 게으름을 피우지 않을 것이다. 숨 쉬고 생활하는 그들의 터전을 온몸으로 깨끗이 핥고 닦아 정화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우렁이들은 곁의 이들과 몸짓을 나누며 소통한다. 장시간 노동 탓에 허기진 우렁이들은 수면에 부유하는 큼직한 상추잎을 노린다. 그들은 벽에 붙은 몸을 길게 늘여보지만 이파리는 닿을 듯 말 듯 앉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우렁이는 헤엄을 치지 못한다. 물 밖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 그래서 수조 바닥에 낮게 가라앉은 먹이만 취할 수 있다. 이래저래 까다로운 놈들이다. 우렁 집사는 상추를 줄 때 조그만 철제 클립을 물려 수면 아래 가라앉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만 한다. 우렁이들이 상추잎을 건드리고 먹어치우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쪼가리들이 늘어난다. 이들이 가까운 거리는 유영하도록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하면 좋으련만.. 그건 머나먼 훗날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허나 기특하게도 우렁이들은 이런 한계를 단시간에 극복했다.
그들은 집사의 눈을 피해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저 수면 위에 떠다니는 먹이를 쟁취하기 위해 그들은 각자 고군분투했지만 여린 잎사귀는 찰랑이며 멀어질 뿐이었다. 그들은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답을 찾았다.
우렁이들은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실이끼 다발을 장식처럼 늘어뜨린, 단단한 암갈색 깍지를 자랑하는 놈이 먼저 등을 내주었다. 한쪽 촉수가 둥글게 말린 것으로 보아 수컷이자 아빠 우렁이가 분명하리라.
이어 암회색 껍질을 미끄러지듯 끌어당겨 그의 등 위로 올라가는 암컷 우렁이가 보인다. 체격이 큰 우렁이가 동료를 무등을 태우는 것처럼, 목말을 올리는 것처럼 서로의 몸을 밀착하여 그들은 합체했다. 이제 살랑거리며 그들을 조롱하고 놀리던 상추잎이 바로 앞 지척이다. 둘의 미동으로 찰랑이는 수면이 잠잠해지자 위에 올라탄 우렁이가 상추를 향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지구에서 쏘아 올린 아폴로 11호가 오랜 항해 끝에 달 표면에 사뿐 안착하는 것처럼.. 미지의 바다 저편에서 결코 손을 내밀지 않던 상추 이파리는 서로를 믿고 의지한 우렁 커플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우리가 해냈어, 성공했다고! 환호하는 우렁 커플의 앵앵대는 미성이 들리는 듯했다. 난 마땅히 침묵 자중해야 할 집사의 신분을 망각하고 그들을 향해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집사들 세상에서 연대, 협력이라 부르는 단어의 의미를 그들은 온몸으로 실천하고 보여 주었다. 정작 그 단어를 창조한 집사 인간들은 갈수록 이기적이고 개인적으로 행동하며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는데도 이들은 반대였다.
허둥대는 적녹색 이파리에 올라탄 암우렁이는 몸을 밀착하여 끈적한 점액을 표면에 남겼다. 한순간 무거워진 상추의 잔해는 기우뚱하며 균형을 잃고 기울어졌다. 저 깊은 수면 아래로, 아래로.. 나풀대며 허물어지는 암녹빛 그림자. 거대 우렁각시와 충돌한 타이타닉 호의 잔영이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등을 내준 다부진 체격의 아빠 우렁이는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곁에 꼬물대며 모여든 다섯 아이들은 흐늘거리는 만찬을 냠냠할 생각에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조그만 껍질을 등에 지고도 헉헉거리는, 갓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 아빠는 잠시 멈추고 기다렸다. 옹기종기 모여든 아이들을 망설임 없이 아빠의 듬직한 나선 뿔고둥 위로 올라탔다. 얘들아, 떨어지지 않게 꼭 잡아라! 아빠 우렁은 항복 선언을 한 것처럼 바닥에 납죽 엎드린 상추잎을 향해 속도를 높여 하강했다. 일찌감치 상륙에 성공한 아이들 엄마는 이파리에 구멍을 숭숭 내며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있었다. 아빠 등에 올라탄 아이들은 일제히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 우렁의 촉수가 안테나처럼 비죽 솟더니 크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우렁이들은 이렇게 서로의 등딱지에 매달려 노는 것을 즐깁니다. 때때로 저렇게 합체하여 수면에 떠오른 상추에 매달리기도 하지요.
"아빠, 뭐해? 우렁이들 물 갈아줘야지?"
"어, 그래, 그래.."
난 우렁이 가족들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 솔과 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세 마리로 시작한 토종 우렁이들은 이제 7 마리로 늘어났다. 실이끼 나발이 근사한 수염처럼 돋아난 아빠 우렁의 등딱지 위로 새끼 우렁 몇몇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우렁이들이 수면 위로 입을 내밀어 뻐끔댄다. 우렁이 마릿수가 두 자리로 늘어나면 널찍하고 투명한 수조를 마련해 줄까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