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법리학

by 통나무집

어두워지는 하늘에 낙조가 번졌다. 가로등에 불빛이 점등하고 건물마다 네온사인 조명이 발광했다. 앞서 달리는 차들의 붉은 후미등이 점묘화처럼 검은 아스팔트 위를 채워나갔다. 도시의 밤은 화려하고도 무미건조했다. 민우는 차의 라디오를 켰다. 이름 모를 팝송이 흘러나왔다. 슬픈 음색의 노래. 차가운 침묵으로 가라앉았던 차 안에 음악이 흐르니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선영을 힐긋 바라보았다. 선영은 묵묵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녁은 뭐 먹을래?"

"항상 먹던 곳으로 가."

다시 차는 고요 속에 잠겼다. 퇴근길에 매일 선영을 태우고 달렸던 강변로가 오늘따라 유난히 막혔다. 도로를 꽉 메운 차들은 더디게 나아가다가 붉은 신호등에 걸려 자주 멈추었다. 평소보다 40분이나 더 걸려 식당 주차장에 들어서기까지, 무거운 침묵 속에서 민우는 앞만 보고 운전을 했고 선영의 시선도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식당에 들어선 두 사람은 항상 앉던 테이블로 향했다. 언제나 시켰던 메뉴를 민우가 주문하는 동안 선영은 말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민우도 핸드폰을 꺼내 들고 이런저런 기사를 검색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고 실업률은 치솟고 N포 세대의 절망은 깊어지고 출산율은 추락하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우울한 뉴스들..... 주식 앱을 열었다. 민우가 샀던 주식들이 파란 화살표를 타고 일제히 추락하고 있었다. 피곤함과 짜증이 몰려와 화면을 껐다. 선영을 흘깃하니 선영은 여전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민우는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없이 먹었다. 선영은 폰을 보다가, 창 밖을 보다가 하면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둘의 시선은 좀처럼 마주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민우는 생각했다. 선영과 사귀고 7년이 흐르는 동안 연인으로서 겪을 희로애락을 모조리 경험했다. 거래처에서 선영을 처음 만났던 날 벼락처럼 사랑에 빠졌다. 풋풋한 구애와 밀당을 거쳐 그녀의 애인이 된 후, 한 2년은 서로가 없으면 죽고 못 살 것만 같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퇴근하자마자 선영에게 달려갔고 밤늦게까지 데이트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새벽까지 통화를 하였다. 주말이면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냈고, 휴가를 맞추어 선영이 좋아하는 동남아나 홍콩으로 같이 떠나기도 했다. 그토록 열렬했던 사랑은 연애 3년 차가 넘어서면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었다가, 한동안 연락을 끊고 냉전을 치른 뒤 다시 화해하는 일이 잦아졌다. 7년째가 되니 선영과 보내는 모든 순간이 무덤덤해졌다. 맛집을 가도, 비싼 공연을 보아도, 여행을 떠나도 더 이상 설레거나 신나지 않았다. 이제 선영과의 데이트는 다른 일상과 마찬가지로 익숙하고 무료할 뿐이었다.

"야. 선영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 같다."

어제, 선영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몰래 전화를 걸어 말했다.

"지성이라고 선영의 직속 선임이 있는데 둘이 자주 어울리더라고. 지난 금요일에는 외근을 핑계로 온종일 붙어다니더라니까."

민우는 친구의 말이 놀랍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짐작이 가는 일이 있었다. 지난 주말에 민우와 선영이 카페에 있었을 때 선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 네. 대리님.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통화를 하는 선영의 목소리에는 따스한 봄바람이 스며 있었다. 누군지 물어보면 괜한 의심을 한다고 화를 낼 것 같아 모르는 척했지만, 민우는 선영이 통화한 상대가 단순한 직장 동료가 아님을 직감했다. 친구의 전화를 통해 자신의 직감이 사실임을 확인했지만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선영에게 자신은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오랜 애증이 쌓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남자 정도로 여겨진 지 오래였다. 언제든 선영이 헤어지자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민우에게도 다른 여자가 있었다.

"선배님. 지하철 역까지만 저를 데려다주세요."

오늘 민우가 퇴근을 준비하는데 후임인 나영이 수줍게 웃으며 부탁했다. 아담하고 가녀린 몸매에 얼굴이 작고 웃는 눈이 예쁜 나영은 성격이 밝고 붙임성이 좋아 회사에서 인기가 많았다. 직속 후임으로 나영이 배정되면서 민우는 수많은 남사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고, 나영이 민우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하자, 그 부러움은 시기와 질투로 번졌다. 난감해진 민우는 애인이 있음을 나영에게 분명히 밝혔는데도 나영의 표현은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 민우는 나영과 거리를 두었지만 선영과의 관계가 권태로워지자 점점 나영에게 마음이 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짐이 많아 힘들어서 그래요. 오늘만 태워주세요. 선배님~."

오늘도 나영이가 애교를 가득 담아 부탁을 하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선영이를 픽업하러 가야 하고... 선영의 직장으로 가는 길 도중에 지하철 역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래. 태워줄게. 같이 가자."

"정말요? 와! 너무 좋아요. 고맙습니당."

나영을 태우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은 즐거웠다. 회사에서 느낀 고충, 친구들과의 추억, 대학 시절 이야기 등 쉬지 않고 조잘조잘 말하는 나영이 귀여웠다. 나영의 화사한 목소리로 차 안의 공기가 훈훈하게 데워졌다. 민우는 가슴 한편이 두근두근거리고 설레는 것이 좋기도 하면서도 내심 선영에게 미안했다. 나영을 데려다주는 것을 선영에게 들킬까 봐 아직 선영이 있는 직장과 상당히 멀었음에도 지하철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멈추었다.

"애인을 데리려 가야 해서, 여기서 내려 줄게. 미안."

"그래요? 힝... 아쉬워요.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더 가면 길을 돌아가야 해서 그래. 미안."

"넹....알겠어요.... 오늘 태워 주셔서 고맙습니당."

나영이 차에서 짐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민우가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선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니?"

놀라서 민우가 돌아보니 선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선영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외근 나왔다가... 근데 이 여자 누구야?"

선영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민우 대리님 직속 후임인 이나영입니다."

나영이 발랄한 목소리로 선영에게 인사했다. 두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렇군요... 반가워요...."

잠시 어색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영아. 여기는 내 여자친구 선영이야. 아무튼 우리는 이만 가야겠다. 여기에 차를 오래 댈 수 없어서..."

나영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넹. 선배님. 내일 뵈어요."

나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가고 선영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민우의 차에 올라탔다.

"후임이 짐이 많아서 내가 잠시 데려다준 거야."

".... 그래..."

이후 선영은 차를 타고 식당에 도착하여 민우가 식사를 마치기까지 말이 없었다.

'오늘 헤어지겠구나...'

민우는 각오했다. 나영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킨 것이 미안했지만 죄책감까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선영과는 허울뿐인 연인 관계였지 않는가. 선영도 직장 상사와 썸인지, 바람인지 모를 관계를 맺고 있는 게 분명하고. 식사 후에 조용한 카페로 옮겨서 헤어지자는 말을 하자고 결심했다.

"선영아. 근처에 좋은 카페가 있는데 가볼래?"

선영이 조용히 시선을 옮겨 민우를 바라보았다. 선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아니야.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자. 나 약속이 있어."

"무슨 약속? 아까는 그런 말이 없었잖아."

"갑자기 생긴 약속이야. 미안해."

"꼭 가야 하니? 카페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선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민우야...."

선영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돼. 나는 알고 있어."

민우는 말문이 막혔다. 선영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원망도 슬픔도 읽히지 않았다. 문득 민우는 깨달았다. 선영은 정말 다 알고 있구나. 우리가 서로에 대한 마음이 사라진 것도. 서로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 하는 것도. 7년 동안 사랑했지만 이제는 미련 없이 우리 관계를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도. 선영은 말없이 알려주고 있구나. 그 모든 것을 굳이 말로 설명하거나 해명하거나 사과하거나 비난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게 나를 위한, 선영의 마지막 배려이구나.... 민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약속 장소가 어디야? 내가 데려다줄게."

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하자."

민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대화는 끝났지만 한동안 민우와 선영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둘 중 한 명이 일어나 나가는 순간, 둘이 함께 했던 7년의 시간이 끝나는 것이었기에, 민우도 선영도 차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 선영이 말했다.

"우리 같이 나가자."

"그래."

두 사람은 함께 일어났다. 가게를 나선 민우와 선영은 말없이 각자 갈 곳으로 향했다. 민우는 주차장을 향해, 선영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차에 올라탄 민우는 뻣뻣하게 앞만 보면서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선영의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민우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백미러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백미러에서 선영의 형체가 점점 작아지다 시선에 잡히지 않는 순간, 민우의 어깨가 무너졌다. 선영과 함께 했던 7년의 기억이 거세게 밀려왔다 거칠게 쓸려나갔다.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리며 민우는 오열했다.




민우의 차가 사라지고 나서도 선영은 오랫동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조용히 흐르던 눈물도 멈춘 지 오래였다. 선영은 밤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선영은 지난 7년 동안의 추억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헤아리다 보면 행복하기도 하고 아릿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이제 보내줘야지. 그동안 민우도 나도 힘들었으니까.'

마음이 떠난 사람과 애써 함께 하는 시간들은 아프고도 슬펐다. 선영은 자신이 민우에게 속박과 의무만 강요하는 굴레와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힘들었다. 떠나가는 민우의 마음을 붙잡으려면 선영이 더 많이 마음을 써야 하는데 선영도 민우와의 관계에서 많이 지친 터라 더는 노력을 할 수 없었다. 민우를 그만 보내주고 싶었지만 지난 7년간 민우와 쌓아왔던 사랑은 선영의 삶에 너무 깊고도 넓게 뿌리내리고 있어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민우를 붙잡을 수도, 보낼 수도 없었던 선영은 다른 누군가를 의지해서라도 이 지독한 애증의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그 무렵 선영에게 선임인 김지성이 다가왔다. 선영보다 세 살 위인 지성은 동갑인 민우보다 더 단단하고 성숙해 보이는 남자였다. 선영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방식도 어른스러웠다. 업무에서 선영을 세심하게 챙기면서, 직장 내에서는 선영에게 곤란한 소문이 돌지 않도록 믿음직한 선임 이상의 언행은 삼갔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는 무심하게 선영의 수저나 젓가락을 챙겨주었고 컵이 비워져 있으면 자연스레 물을 채워주거나 냅킨을 건네주었다. 회식에서 누군가 선영에게 무례하게 술을 권할 때 지성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겨주었다. 이런 모습에서, 선영은 자신을 동료를 넘어 여자로서 느끼는 지성의 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민우와의 관계가 어려워지면서 선영은 조금씩 지성에게 마음이 더 열리는 게 느껴졌다. 선영의 마음에 지성이 조금씩 들어서면서 민우를 떠나보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지성과 단 둘이 외근을 나갔을 때 선영은 잠시나마 민우를 잊고 지성과의 시간에 몰두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가끔 지성이 건네는 말에 직장 후임이 아니라 여자로서 반응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선영은 민우를 진짜 떠나보내게 될 때가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오늘, 민우의 차에서 내리는 여자를 보았다. 이나영. 여자인 선영이 보기에도 예쁘고 깜찍하며 발랄했다. 민우의 마음을 설레게 할 매력으로 가득한 여자..... 하지만 선영은 나영을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나영의 첫인상에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악의가 감지되었다. 네가 민우 선배의 여자이구나. 조만간 내게 빼앗기게 될 거야.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어... 순진한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나영의 모습에서 교묘하게 위장된 오만과 잔혹함이 느껴졌다. 선영은 나영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여자들을 떠올려보았다. 진실한 사랑 따위는 믿지 않던 여자. 자신의 매력으로 남자의 마음을 빼앗고 남자를 착취하고 가차 없이 버려버리는 과정에서 느끼는 우월감과 희열을 사랑하던 여자.... 여자들의 세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여성의 직감으로 선영은 느낄 수 있다. 나영은 민우를 아프게 할 여자였다. 이민우... 한없이 착하고 순수한 남자. 선영에게서 마음이 떠났어도 선영이 받을 상처와 아픔이 걱정되어 차마 떠나가지 못할 정도로 여린 사람... 그런 민우가 나영을 만나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했다. 민우와 함께 식당으로 가는 길 내내 나영에 대해 어떻게 경고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선영은 결국 나영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구차해지고, 민우가 어떻게 나올지 뻔했기 때문이다. 아마 나영이 그런 여자가 아니라며, 떠나가는 마당에 더러운 수작 하지 말라고 화를 내겠지. 민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쉽게 믿고 쉽게 상처를 받는 남자. 선영은 나영에 대한 자신의 직감이 틀렸길 바랐다. 그리고 혹시나 나영이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여자가 맞다면 민우가 너무 다치기 전에 잘 빠져나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민우는 나영과 연애를 시작했다. 아직 선영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회사에서는 환승연애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나영과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퇴근 후에나 주말에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영과 데이트를 즐겼다. 나영을 만나면서 민우는 오랜만에 풋풋한 설렘을 느꼈다. 한껏 꾸민 나영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영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아찔하게 짧은 스커트를 하늘하늘 휘날리며 달려올 때 민우의 심장은 두근두근 뛰었다. 애인이 되자 나영의 애교는 더 화려해졌고, 애정 표현은 좀 더 농밀해졌다. 선영과의 사랑에서 편안함과 친밀함을 누렸다면 나영과의 연애는 짜릿하면서 묘하게 성적인 흥분을 일으켰다. 민우는 나영의 마력에 빠져들어갔다. 불현듯 떠오르는 선영의 모습을 잊고 싶어 민우는 의식적으로 더욱 나영과의 연애에 몰두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선영의 부재는, 예상보다 더 묵직한 슬픔과 거대한 공허감을 민우에게 가져다주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난 행복한 사람이야..'

강박적으로 이 말을 되뇌며 민우는 선영의 부재를 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나영과 데이트를 즐기는 순간에도 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선영과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다. 나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오빠! 지금 또 옛 애인 생각하는 거야?!"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나와 있을 때는 나만 바라보라 했지!"

"미안... 다신 안 그럴게."

"남친이 전 여친 생각하는 게 여자에게 얼마나 비참한 건 줄 알아?! 난 계속 오빠 전 여친과 비교당하는 느낌이라구!!"

"미안...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내 이전 남친도 계속 전여친과 날 비교했단 말이야! 그게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 줄 알아?!"

"미안.. 진짜 안 그럴게...."

민우는 빌고 또 빌었다. 화가 났을 때 나영은 면도날처럼 예리했다. 민우의 죄책감을 극도로 자극할 수 있는 말을 골라 사정없이 민우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민우는 나영 앞에 서면 미안함과 자괴감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내가 환승연애라는 손가락질도 참으면서 오빠를 만나고 있잖아. 알아서 좀 잘해."

"미안. 정신 차릴게..."

나영은 마녀처럼 혹독하게 민우를 몰아치다가도 어느 순간 더없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어 민우의 마음을 녹여버렸다.

"오빠. 오빠 생각해서 짠 장갑이야. 이쁘지."

"우와. 진짜 예쁘다."

"이거 진짜 많은 정성을 들인 거야. 올해 겨울 추우니까 꼭 끼고 다녀."

"고마워. 우리 나영이밖에 없다."

민우는 나영이 준 장갑을 끼며 황홀한 기분을 느꼈다. 비록 장갑이 손 크기에 비해 많이 작아서 손바닥이 훤히 드러났지만 나영의 정성을 생각하니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나영의 감정은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변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렇게 사근사근하고 애교가 넘치다가도 조금만 감정이 나빠지면 차디찬 얼음장처럼 냉혹하게 돌변했다.

"오빠. 실망이야."

"왜? 뭐 때문에 또 화가 났니?"

"오빠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몰라?!"

".... 내가 뭐 잘못했어?"

"아 진짜! 오빠 너무 답답해!! 내가 일일이 설명해 줘야 아는 거야?!"

"..... 미안해......"

"울 아빠도 그랬어! 지 잘못이 뭔지 모르면서 나만 혼냈다구! 그래놓고 멋대로 떠나버리고! 오빠도 그럴 거야?!"

"아니야... 나영아.. 난 안 그럴게... 미안해.."


민우는 나영의 기분을 맞추느라 진땀이 났다. 점점 나영과 보내는 시간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선영과의 연애는 이렇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편안했고 짜릿한 즐거움은 덜했지만 꾸밈없이 잔잔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선영은 민우를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었다. 아무리 심하게 싸우는 상황 속에서도 민우는 선영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선영은 민우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다투는 한이 있어도 민우와의 갈등을 반드시 풀어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나영은 달랐다. 나영은 언제든 쉽게 민우를 버리고 떠날 수 있음을 자주 경고했다.

"오빠. 계속 이러면 나 갈 거야."

"그만해! 오빠. 나 피곤해. 나 집에 갈래."

"싫어. 싫다구! 진짜 오빠 왜 이래? 참나.."

"우리 그만 헤어져... 내가 오빠를 잘못 알고 있었나 봐."

이런 나영 앞에서 민우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나영을 어르고 달랬다가, 사과에 사과를 거듭했다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기까지 했다. 점점 민우는 나영과의 만남에 지쳐갔다. 슬프고 괴로웠다. 선영과 함께 지냈던 경험이 없었다면 이토록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우는 자주 선영과 만났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더없이 편안했고 든든한 안정감이 느껴졌으며, 감추거나 계산할 것 없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고, 스스로를 꾸미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들. 그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지금 나영과 보내는 순간순간이 지독하게 모멸스럽고 고달팠다. 민우는 멍하니 생각했다.

'선영이가 정말 보고 싶다. 걔는 뭐 하고 있을까.....'

민우는 선영에게 처음 고백했던 순간을 생각했다. 무척 설레고 두렵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받아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던 그 시간. 그때의 떨림, 긴장, 초조함. 그리고 벅찬 환희....

'그러고 보니 내일이 내가 선영에게 처음 고백했던 날이구나....'

민우는 선영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표현했던 호프집을 회상했다.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운데 민우와 선영은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고백을 하겠다고 만났던 자리였다. 선영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민우는 선영이 자신의 여자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민우는 선뜻 마음을 표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영이 고백을 받아줄 거란 직감은 들었지만, 혹시 거절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때 선영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건넸다. 민우는 그 말에 힘입어 고백을 했고 선영은 웃으며 받아주었다.

갑자기 그 공간이 무척 그리워졌다. 민우는 선영에게 고백했던 바로 그날, 그 시간에, 그 호프집을 찾아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선영은 지성과의 연애를 섣불리 시작하지 않았다. 민우와 헤어지면서 상처 난 마음을 충분히 다독여서 잘 회복한 다음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었다. 당분간은 민우를 잃은 슬픔을 애도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지성도 선영을 재촉하지 않았다. 선영이 슬픔에 젖어 잠시 업무를 놓쳤을 때도 지성은 드러내지 않고 선영의 실수를 덮어주었다. 선영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지성이 책상 위에 몰래 놓아둔 작은 선물들을 발견했다. 캔커피, 초콜릿, 사탕, 바닐라 라떼... 모두 선영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지성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선영과 지성은 점점 더 자주 만나가며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조심스레 알아가기 시작했다. 지성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공연을 보고, 길거리를 거닐면서 선영은 지성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성숙하면서 자상하고 섬세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지성의 행동은 여유로우면서도 항상 선영을 향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길을 걸을 때 지성은 자연스럽게 차도 방향에서 걸으며 선영을 에스코트했고, 선영과 대화할 때는 선영이 하는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선영의 마음을 공감해 주었다. 지성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간혹 건네는 그의 말들은 부드러우면서도 확신으로 가득했다. 스스로를 신뢰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는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언어였다. 선영은 지성과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민우의 부재를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성에게서 성숙하고 섬세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선영은 마음 어딘가가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민우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금 같은 청춘 시기에 7년이나 함께 했던 남자. 열렬히 사랑했고 마음 깊숙한 곳까지 열어보였고, 일상의 대부분을 같이 보냈으며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며 기쁨과 슬픔을 오롯이 공유했던 사람. 그 남자가 인생에서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으니 마음이 공허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이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영은 지금 느끼는 공허함의 원인이 지성과 보내는 시간 속에 숨어 있음을 직감했다. 선영은 자신의 직감이 주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그리고 질문했다. 지성은 남자로서 더없이 완벽한데 왜 나는 그와 만날 때마다 매번 공허감을 느꼈을까... 선영은 지성과 만나는 순간들을 돌아보며 그때 들었던 감정과, 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모두가 좋았던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석연치 않았던 장면이 몇 가지 있었다. 민우를 잃은 슬픔과 직장에서 받은 오해로 선영이 매우 날카로워졌던 날에 선영은 자기도 모르게 날 선 말들을 지성에게 내뱉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성은 슬픈 표정으로 묵묵히 선영의 말을 감당하고 있었다. 몹시 후회가 되고 죄책감이 몰려왔다. 선영은 정신 없이 사과했다. 미안해요.. 지성 씨에게 화나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지성은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영 씨. 저는 다 받아줄 수 있어요. 제게 더 편하게 대해주셔도 돼요... 그런 지성의 말이 고마웠지만 지성의 자상한 말이 이어질 수록, 선영 자신은 참 미숙하고 모자란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른 장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픔이든, 스트레스든 어떤 이유로 선영은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드러내었고, 지성은 잠자코 받아주었고, 선영은 너무 미안해하며 사과했고, 지성은 자상하게 용서해주었고... 그런 패턴이 반복되었다.

생각을 거듭하면서 점점 하나의 결론이 떠올랐다. 그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려고 했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모든 생각은 동일한 결론으로 수렴했다. 선영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리고 지성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선영은 카페의 창가에 앉아 지성을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카페 문을 열고 지성이 들어섰다. 선영은 환하게 웃으며 지성을 맞이했다.

"지성 씨. 갑자기 불러 미안해요."

"선영 씨가 부탁하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지성은 세 살 위인데도 항상 선영에게 존댓말을 했다. 그 말투가 선영은 고맙고 듣기 좋았다.

"마침 보고 싶었는데 불러줘서 고마워요."

참 자상한 사람... 선영은 마음 한편이 따스해졌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뭐 드시겠어요."

"음. 선영 씨 뭐 좋아해요? 오늘은 선영 씨와 같은 것을 마셔보고 싶네요."

"저는 바닐라 라떼를 좋아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좋아요. 오늘은 달달한 맛을 즐겨볼까요. 같은 것으로 부탁드려요."

주문을 하고 자리에 돌아온 선영은 지성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둘은 잠시 바닐라 라떼를 마시며 침묵했다. 잔잔한 음악이 두 사람을 감쌌다. 지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영 씨.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죠?"

"....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느껴졌어요. 오늘 선영 씨의 분위기가 좀 다르기도 해서요."

선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지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말이든 괜찮아요. 편하게 말해봐요. 제가 외모는 부드러워도 맷집은 제법 강하답니다. 하하."

선영도 따라 웃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선영이 입을 열었다.

"지성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지성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지성 씨를 직장에서 처음 뵈었을 때는 자신감이 넘치고 꼼꼼하게 일을 잘하고 성실하신 분으로만 알았는데 남자로서 지성 씨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지성 씨는 정말 멋진 분이세요. 자상하시고 섬세하시고 매너도 좋으시고... 제가 옛 애인과 헤어져서 제가 힘들어할 때도 저를 기다려 주시고 매일 챙겨주셨던 모습도 믿음직스럽고 고마웠어요.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지성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지성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했다.

"칭찬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지금 선영 씨는 마치 떠나갈 사람처럼 말하고 있네요.... 제 느낌이 맞나요?"

선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좀 당황했습니다. 지금까지 선영 씨는 저와 있는 동안 편안해하셨던 것 같은데... 혹시 제가 선영 씨에게 뭔가 잘못한 게 있었을까요?"

"아니에요. 지성 씨는 제게 너무나 잘해주셨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지성 씨 때문이 아니에요. 저 자신 때문이죠."

"음.... 좀 더 설명해 주세요."

선영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말을 시작했다.

"저는... 바닐라 라떼 같은 여자예요."

선영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바닐라 라떼는 에스프레소의 쓴 맛과 바닐라 시럽의 달콤한 맛을 섞어서 만들어요. 쓴 맛이나 단 맛 중에 하나가 없어도 바닐라 라떼는 맛을 잃어요. 저도 그런 사람인가 봐요. 저에게는 바닐라 시럽처럼 달콤하고 좋은 면도 있지만 에스프레소처럼 쓰디쓴 모습도 있어요. 지성 씨를 만나면서, 저 자신이 달콤한 맛으로만 가득한 사람이 못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지성 씨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항상 바닐라 시럽처럼 달콤하신 분이에요. 옛 남자친구와 이별해서 쓰디쓴 맛에 절어 있던 제게, 지성 씨의 애정은 너무나 달콤하고 좋았어요. 하지만.... 지성 씨의 달콤한 사랑이 좋으면서도 제 마음은 자주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껴요. 서로 밑바닥까지 내보이며 거침없이 싸우다가, 세상 다 가진 듯 웃다가,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 하면서... 달콤함과 쓴 맛을 함께 버무리며 사는 삶.... 저는 그런 삶을 지성 씨와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저와 살면 지성 씨가 점점 더 힘들어지실 거예요."

지성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너무 달콤한 사람이라 선영 씨와는 안 맞다는 말인 거죠? 선영 씨는 달콤한 맛과 함께 쓴 맛도 즐길 수 있는 사랑을 원하시니까요..."

선영은 웃으며 말했다.

"지성 씨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 저와 맞지 않는 거예요. 저는 지성 씨만큼 좋은 사람이 못 되거든요. 지성 씨의 달달함만큼 저도 달콤해야 할 텐데, 저는 쓴 맛도 강한 사람이라서요.. 지금은 지성 씨의 달콤함에 취해 저도 달달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 쓰디쓴 모습이 강하게 드러날 거예요. 그러면 지성 씨도 힘들어질 거고요. 그렇게 되기 전에 제가 먼저 그만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지성은 한숨을 깊이 내쉬며 말했다.

"그렇군요.... 선영 씨는 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편안한 관계를 원하시는 거군요... 이전에 사귀던 분과는 그러셨나 보네요."

"장난 아니었어요. 서로 고함을 지르고, 때론 물건을 집어던지고... 호호. 미친 듯이 쌍욕을 퍼부은 적도 있어요. 그러다 며칠 연락을 끊고 잠수 탔다가 감정이 좀 풀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으러 가고요."

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영 씨는 제 예상보다 훨씬 터프한 분이셨군요.... 맞아요. 저는 그렇게까지 거칠게 마음을 터놓는 관계를 힘들어합니다. 저에 대해 잘 파악하셨네요."

"저는 직감이 좀 예리해요. 저와 맞는 사람인지 잘 감지하는 편이지요."

지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알겠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만 남아 있을 때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네요. 우리 연인으로서는 그만 만나기로 해요. "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지성 씨와 보냈던 순간들은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너무 달콤해서요."

"저도 감사했습니다... 선영 씨는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예전 남자 친구분은 새로운 애인을 만나고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선영 씨와 맞는 새로운 사람을 찾으실 건가요?"

선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 직감에 따르면... 저는 아마도 내일, 그 친구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아요. 내일 그 친구가 어디에 있을지 왠지 알 것 같거든요."

지성도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 직감이라면 선영 씨는 점집을 차려도 되겠어요. 하하하. 아무튼 내일 무사히 그 친구분을 만나시길 바라겠습니다."





민우는 호프 집에 혼자 앉아 있었다. 주위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고 경쾌한 음악이 요란하게 울렸다. 민우는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저녁 8시. 민우가 선영에게 고백했던 시간은 9시였다. 선영이 그 시간에 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민우는 무작정 기다렸다. 핸드폰으로 나영의 카톡과 부재중 전화가 쌓이고 있지만 무시했다. 나영과 관계를 지속할 의지도 힘도 없었다. 차라리 외롭게 혼자 지내고 말지, 나영과의 모멸스럽고 불안정한 연애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선영은 오지 않겠지. 직장 선임과 잘 되고 있다고 하던데....'

민우는 슬픈 눈으로 선영과 함께 앉아 있던 자리를 둘러보았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붉은 벽돌과 검은 철판으로 인테리어 한 실내도, 적절히 어두운 조명도, 맥주를 마시며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쿵쾅쿵쾅 울리는 노랫소리도.... 잠시 민우는 처음 선영에게 고백하려 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호프 집에 먼저 도착해 선영이 들어오길 초조하게 기다렸지. 갑자기 나에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어. 그렇게 시끄러웠는데도 이상하게 선영의 발소리임을 확신할 수 있었지. 너무 가슴이 뛰어서 발 밑만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 지금은 들을 수 없겠....'

"먼저 왔네?"

민우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황급히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선영이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민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 선영 씨..."

선영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웃기고 자빠졌네. 선영 씨가 뭐야."

선영은 민우를 옆으로 밀치며 의자에 철퍼덕 앉았다. 선영의 눈치를 살피던 민우는 조심스럽게 옆 자리에 앉았다. 선영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민우 너. 나에게 처음 고백했던 순간을 생각하고 있었니?"

민우는 더욱 울상이 되었다. 민우가 울먹이며 말했다.

"선영아.. 흑. 크흑... 미안...해..흑"

"아 쫌! 다 큰 남자가 왜 이렇게 눈물이 헤프니? 됐으니까 그만해."

"크흑, 큭.. 아니야.. 선영아. 흑. 흑흑 내가...."

"아 놔... 진짜. 으이그... 이 웬수야. 그만 좀 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까."

민우는 한동안 끅끅 거리며 울었다. 선영이 면박을 주니 대놓고 울지도 못하고, 울음을 참아 보지만 울음이 쉽게 잡히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선영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민우가 울음을 수습할 때까지 기다렸다. 겨우 울음을 그친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직장 선임과 잘 돼 가는 거 아니었어?"

"당연히 잘 되고 있었지. 근데 니가 눈에 밟혀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 그냥 좋게 이야기하고 헤어졌어."

민우의 눈이 다시 붉어졌다.

"... 흑. 크으흑... 선영.. 아.."

짜증이 확 일어난 선영은 민우의 입을 틀어막으며 외쳤다.

"야! 이 XX야!! 그만 좀 울라고!! 사람들이 다 우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잖아!"

선영의 서슬에 놀라 민우의 울음이 쑥 들어갔다. 선영은 자기 손에 묻은 민우의 콧물을 보고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가 냅킨을 뽑아 닦으며 말했다.

"근데 너도 그 이쁘장한 여자애와 잘 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이름이 뭐였더라.. 아영이었던가?"

민우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나영이? 으으...말도 마라. 걔 완전 여우였어. 아니, 아니.. 그냥 여우가 아니라...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이름이 뭐였더라?"

"구미호?"

"맞다! 맞아. 구미호. 와.. 나 진짜 걔 무서웠어. 구미호는 간만 빼먹지. 그년은 사람 혼신을 다 빼먹으려 했다니까."

선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직감이 좀 좋잖아. 첫눈에 알겠더라. 걔 완전 여우 눈깔이더만. 민우 넌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냐? 이 멍충아."

원 없이 민우를 구박하면서 선영은 속이 시원해졌다. 지성과의 보내던 시간을 떠올렸다. 무척 낭만적이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서로 조심스럽게 배려를 주고받는, 그런 달달하기만 한 연애는 도저히 오래 못할 짓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무지 답답했으리라. 때론 속도 썩이고 대차게 싸우기도 하고 면박도 주고받으면서, 민우와 함께 있을 때 선영은 후련하고 편안했다.

선영과 민우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이전에 두 사람을 짓눌렀던 무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선영의 소중함을 각인한 민우는 선영을 편안히 대하면서도 함부로 여기지 않았고, 민우가 가장 자신에게 맞는 사람임을 확인한 선영은 민우에게 더 허물없이 대하면서도 진한 애정을 느꼈다. 둘은 오랜 친구처럼 막역했고 오랜 세월 함께 늙은 노부부처럼 서로에게 서로가 가장 의지가 되었다.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밤늦은 시간이 되어 호프집을 나섰다. 검은 하늘에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도시 곳곳에 크리스마스트리 전등이 붉고 파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캐럴이 은은하게 울리는 거리를 비틀비틀 걸어가는 민우와 선영은 마음이 호젓하고 홀가분했다. 민우가 잠시 주저하다 선영에게 말했다.

"선영아.."

"왜?"

"있잖아..."

"아 씨.. 또 뜸 들이네. 그냥 좀 말해. 말을 하라고."

민우는 여전히 우물거렸다. 선영은 또 확 소리를 지를까 하다가, 문득 장난기가 느껴졌다. 선영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상냥하게 말했다.

"민우 씨. 괜찮아요. 저는 다 알고 있어요. 편하게 말해봐요."

순간 민우는 멍하니 선영을 바라보았다. 민우가 처음 선영에게 고백할 때 선영이 했던 말. 거절이 두려워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던 민우에게 선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건넸던 그 문장. 그 말에 힘입어 선영에게 고백했었지.... 민우는 숙연해졌다.

"선영아. 고백은 죄인 것 같아."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민우의 어투가 진지해서 수연은 잠자코 물었다.

"무슨 말이야?"

"고백은 죄야. 심각한 범죄이지. 한 여자를 한 남자에게 오랫동안 속박시켜 놓으니 말이야. 그 여자가 얼마나 답답하겠어. 맘에 안 들어도 쉽게 떠나지도 못하고.."

"하이고.. 이제 좀 깨달은 모양이네.. 고백이 죄라면, 그 죄를 지은 대가로 받는 벌은 뭐니?"

민우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벌은... 고백을 받아 준 그녀를, 내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는 것. 설령 그녀가 싫어지고 미워져도 그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

선영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게 니가 할 소리니? 최선은 개뿔. 중간이나 하세요."

"그치...... 나 말이야. 남은 평생은 너에게 벌을 받고 싶어."

"응? 뭔 말이야?"

"내 남은 평생 동안 너에게 벌을 받고 싶다고. 선영아."

순간 선영은 멍해졌다. 민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답을 준 것은 선영의 직감이었다.

"너... 설마.. 이게... 프로포즈니?"

민우는 수줍게 말했다.

"....응..."

선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야! 이 마조히즘 XX야! 평생 벌을 받겠다고?! 무슨 프로포즈를 이 따위로 해! 너... 좋은 말로 할 때 일주일 안에 제대로 프로포즈해라. 안 그러면 내가 너를 당장 차버릴 테니까!"

선영은 씩씩 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낭만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 아니 고민해서 생각해 낸 것이... 고백이 죄라고.... 사랑이 벌이라고... 그 벌을 평생 동안 받고 싶다고... 하... 이런 변태 같은 고백은 또 난생처음이네... 나 원 참... 중얼중얼거리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선영은, 왜 자신의 입에서 미소가 지어지는지, 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는지, 도대체 이 가슴은 왜 이리 벅차게 차오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영아. 같이 가."

"아! 쫌! 따라오지 마!"

"선영아. 응. 선영아."

"그냥 거기 서 있어! 내게서 멀리 떨어지라고!"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비틀비틀 걸어가는 선영이, 민우는 너무 귀여웠다. 일부러 선영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며 선영을 뒤쫓는 민우는 생각했다. 프로포즈는 어디서 할까. 결혼식은 내년 봄에 하면 좋겠지. 신혼여행지는 선영이 좋아하는 홍콩으로 갈까나...

민우와 선영이 걸어가는 길 옆으로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화사하게 점멸했다. 함박눈이 포근하게 내리는 밤이었다. 하얗게 내린 눈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점점이 찍혔다. 두 사람의 발자국은 오랫동안 벌을 받은 죄수의 걸음처럼 비틀거렸지만 분명하게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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