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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의 땅에서

by 통나무집

굵은 눈발이 휘몰아쳤다. 돌멩이처럼 단단한 눈 알갱이들이 세차게 얼굴을 휘갈겼다. 겨우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두터운 털옷을 여러 벌 겹쳐 입었음에도 섬뜩한 추위가 몸 깊숙이 스며들었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매번 다리를 휘어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노엘은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추위와 피로로 뻣뻣하게 굳어진 근육과 힘줄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멈추면 얼어 죽는다. 어떻게든 가야 해...'

등에 짊어진 지게의 무게가 묵직하게 노엘의 몸을 짓눌렀다. 지게 끈이 어깨에 깊이 파고들면서 저릿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노엘은 지게를 내팽개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노엘은 지게의 어깨줄을 단단히 거머쥐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이 눈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갔다. 발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은 지 오래였다. 심한 동상으로 발가락이 잘려나갔던 선임들이 떠올랐다. 노엘은 머리를 흔들어 불안한 생각들을 떨쳐냈다.

"헉.. 헉... 선배님...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고개를 돌아보니 후배인 요엘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서 있다. 요엘은 지게꾼으로 고작 한 해만 보냈던 햇병아리였기에 작업을 나갈 때마다 사사건건 신경이 쓰였다. 그는 지게를 메는 요령이 없어 많은 짐을 짊어지지 못했고 길이 조금만 미끄러워도 쉽게 넘어져 귀중한 짐을 부수기 일쑤였다. 두텁게 덮인 눈 아래에 숨겨진 얇은 얼음장이나 크레바스를 식별할 안목이 없어서 위험한 곳으로 거침없이 걸어가는 요엘을 황급히 붙든 적도 많았다. 노엘은 자신의 짐들을 감당하는 것도 버거운데 요엘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지만, 병든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단한 지게꾼의 삶을 선택한 요엘이 안쓰러워 매번 세심하게 그를 챙겨주었다.

"조금만 힘을 내게.. 저녁 무렵이면 도달할 수 있을 거야."

노엘 혼자 걸었다면 늦어도 오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몸이 허약한 요엘은 조금만 걸어도 앓는 소리를 했고 자주 휴식 시간을 요청했다. 이런 요엘을 다독였다가, 화를 내며 재촉했다가, 어쩔 수 없이 멈추어 쉬었다가 하며 걷다 보면 일정은 하염없이 늘어졌다. 요엘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컥.. 크윽.... 선배님.... 저는... 안 되겠어요... 조금만 쉬었다 갈게요.. 먼저 가세요...."

노엘은 짜증이 확 일어났다. 조금 전에도 요엘이 힘들어해서 예정에도 없는 휴식 시간을 가졌다. 초조하게 요엘이 회복되길 기다렸다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렇게 약한 소리를 내뱉다니... 이 속도로 가다가는 저녁이 아니라 한밤중에 도착할 것 같았다. 노엘은 요엘을 내버리고 혼자 가버리고 싶은 충동에 잠시 사로잡혔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요엘! 약한 소리 하지 마! 지금 이 속도로 걸으면 우린 내일 새벽에나 도착하게 돼!"

요엘은 더욱 울상이 되었다. 요엘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헉.. 커헉..... 선배님. 도저히 안 되겠어요.. 죄송합니다.... 제발 먼저 가세요... 저는 알아서... 따라가겠습니다...."

노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악한 지도를 의지하여 두텁게 뒤덮인 눈 속에 숨겨진 표지들을 찾아 거센 눈보라를 뚫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칠 년 이상 지게꾼으로 살아온 노엘에게도 쉽지 않았다. 요엘 같은 초보자는 끝도 없이 펼쳐진 대설원 위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노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야... 내가 자네 짐을 몇 개 짊어져 줄 테니 조금만 더 힘을 내게."

노엘은 요엘의 지게에 실린 짐들 중 무거워 보이는 물건들을 자신의 지게로 옮긴 뒤에 다시 지게를 메고 일어섰다. 이전보다 더한 무게가 온몸을 짓누르면서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고 머릿속이 새하애지면서 핑 돌았다. 이런 상태로는 오래 걷지 못할 것 같았다.

'제기럴... 생각보다 몸에 무리가 가는군... 다음 휴식 시간 때 다시 요엘의 지게로 옮겨 실어야 하겠어..'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노엘은 다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지게의 하중은 노엘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어서 조금만 발을 삐끗해도 무릎이나 발목을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노엘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노엘에게 미안해진 요엘이 더 이상 앓는 소리를 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 걸어와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차라리 내가 더 고생하고 말지... 요엘 저 녀석이 종일 지껄이는 신음 소리는 정말.... 더는.. 못 들어주겠어... 어이구..'

한참 동안 둘은 묵묵히 걸었다. 앞만 보고 걷던 노엘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사방에서 강렬한 적개심이 물밀 듯 밀려왔다. 노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와 같은 풍경이었다. 시야에 가득히 펼쳐진 대설원, 하얀 눈발이 거세게 몰아치는 하늘 아래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라곤 자신과 요엘 둘 뿐인 광막한 세계.... 그러나 무언가 맹렬한 분노와 같은 기운이 저 너머에서 한껏 몸을 도사린 채 여기를 노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지점으로 노엘은 시선을 집중했다. 저 멀리서 새하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한 점에서 시작된 하얀 안개는 점차 범위를 넓혀가며 급속도로 번져왔다. 바람의 기세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순백으로 빛나던 땅 위로 불길한 회색 그림자가 짙게 밀려왔다. 하늘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웅웅 울었다. 노엘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요엘! 큰일 났다!! 눈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어!"

요엘의 눈빛이 공포로 물들었다. 요엘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폭풍우가 밀려오는 관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노엘은 요엘의 멱살을 휘어잡고 외쳤다.

"정신 차려!! 어서 피할 곳을 찾아야 해! 주위에 몸을 숨길 만한 굴이나 바위를 빨리 찾아!"

그제야 요엘은 허둥지둥 고개를 돌리며 피난처를 찾았다. 노엘도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폭풍우를 피할 공간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노엘은 이를 악물었다.

"요엘! 어서 구덩이를 파라!"

노엘은 지게에서 삽을 꺼내 미친 듯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요엘은 멍청한 눈빛으로 노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노엘은 분통을 터트리며 요엘의 뺨을 휘갈겼다.

"정신 차리고 내 말대로 해! 구덩이를 판 뒤 지게를 지지대로 삼고 눈을 쌓아 방벽을 만드는 거다! 빨리 움직여!!"

두 사람은 황망하게 눈을 파서 두 사람의 몸을 숨길만한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폭풍우가 불어오는 방향에 둘의 지게를 눕힌 뒤 지게 앞으로 눈을 쌓아 바람벽을 세웠다. 그 사이에 사위는 더욱 어두워졌고 바람은 앞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모조리 쓸어버릴 기세로 흉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노엘은 급히 요엘을 구덩이로 밀어 넣은 후 자신의 몸으로 요엘을 덮었다.

'신이시여.... 제발.... 한 번만... 은혜를 베푸소서..... '

폭풍우가 날카로운 발톱들 드러내고 천지를 사정없이 휘갈기고 후벼 파며 발톱에 걸린 모든 대상을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사방에서 거대한 눈사태가 터져 나오고 두껍게 덮인 설원이 거대한 파도가 노도처럼 일어서는 바다처럼 맹렬하게 출렁였다. 신의 진노가 임한 듯 무자비하게 몰아치는 폭풍우의 폭정 속에서 하늘과 땅이 일제히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서리를 쳤다. 속에서 요엘이 연신 내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길..... 이제 끝이로구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세 살이 된 쌍둥이 딸을 돌보며 노엘이 무사히 귀환하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아내.... 노엘은 임박한 죽음보다 자신이 죽고 난 뒤 아내와 딸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더 두려웠다. 혹한의 땅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질고는 지금 천지를 잡아먹을 듯 휘몰아치는 폭풍우만큼 혹독할 것이었다. 노엘은 흐릿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었다.

'정신을 잃으면 끝이다. 눈에 파묻혀 영영 깨어나지 못할 거야.'

노엘은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한 번만 살려주소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제 모든 삶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무정하게도 눈 폭풍우는 맹위를 더해갔고 결국 노엘은 정신을 잃었다.




"노엘아. 지게꾼은 힘보다 집중력이 더 중요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무거운 지게를 짊어지고 오랫동안 걸으려면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해. 호흡도 흐트러뜨려선 안 되고.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자세와 호흡에 대한 집중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지게꾼이 될 수 있단다. 무작정 힘만 믿고 나대가는 금방 지쳐 나가떨어질 뿐이야."

노엘은 생각했다.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언제 나누었지? 아.. 열여섯 생일날이었구나. 내가 아버지를 따라 지게꾼이 되겠다고 선언했던 날...'

노엘은 지금 자각몽을 꾸고 있음을 깨달았다. 죽음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예전 추억이 생생한 꿈처럼 떠오른 듯했다. 아버지 옆에 서 있는 얼음에 얼굴을 비추어보니 마흔셋이 되기까지 삶의 풍파에 찌든 중년 남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열여섯 소년의 여리고 풋풋한 외모가 보였다.

'하필 이런 기억이 떠올리게 하시다니... 신께서도 너무 하시는군...'

그날 노엘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예순이 될 때까지 지게일을 하시다 길 위에서 돌아가셨던 아버지.... 평생 지게꾼으로 살아오셨던 아버지에게 직접 지게를 짊어지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길을 나섰던 열일곱 생일날에, 노엘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때 노엘은 고된 지게꾼의 삶을 고집하는 아버지가 답답했고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짊어지고 싶지 않은 지게를 메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이 서러웠다. 아들마저 고달픈 지게꾼의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현실이 아버지에게도 괴로울 것이 분명해서 노엘은 슬픔과 서러움을 꾹 참으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덤덤했고, 지게꾼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동안 아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심한 지도가 이어질수록 노엘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는 고작 지게를 짊어지는 삶이 뭐가 그리 좋아서 그토록 집착하셨단 말인가... 지게꾼의 벌이로는 온 가족이 근근이 목숨만 연명하고 있건만..... 당신이 지게꾼 일을 고수했기에 아들인 나마저도 원치 않은 지게꾼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지게는 살아있는 생명과 같아. 지게가 몸에 들려주는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어야 지게와 함께 오랫동안 길을 걸을 수 있단다. 노엘아. 명심하거라."

순간 노엘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 잘난 지게와 함께 아버지나 평생 같이 사시라구요! 저는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저놈의 지게. 끔찍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노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지겹지도 않으세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지게를 짊어지고 평생 허리가 휘어지도록 눈 속을 헤매는 삶이 끔찍하지도 않으시냐구요? 왜 그런 삶을 제가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냐구요?! 네!? 아버지!"

아버지의 눈빛이 슬픔과 쓸쓸함으로 차올랐다. 노엘은 아버지가 뭐라고 항변했으면 싶었다. 차라리 버릇없는 녀석이라고 화라도 내셨으면 싶었다. 아버지와 함께 소리를 지르며 싸워서라도 내면에 가득 찬 한과 분노를 털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묵묵히 노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저 사람들을 보시라고요! 아버지!"

노엘은 저 멀리에서 개썰매를 타고 설원을 질주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하얀 밍크코트를 입은 그들은 화려하게 꾸며진 붉은 썰매 위에 앉아, 시베리안 허스키, 알래스카 말라뮤트와 같은 값비싼 썰매 개들의 거침없는 질주에 힘입어 설원 위를 경쾌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저들에게는 아무런 삶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오랜 시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걸어야 하는 지게꾼의 운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책임이나 의무 따위는 모두 던져버리고 가볍고 유쾌하게 삶의 환희를 즐기는 자들.... 노엘은 다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원에 강하게 반사되는 태양빛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거멓게 타버린 아버지의 얼굴.... 노엘은 아버지의 삶을 모조리 부인하고 모독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모르시겠어요? 아버지의 인생은 완전히 실패했다구요! 그리고 제 인생도 끝나버렸어요! 저는 이제 평생 동안 지게나 끌며 겨우겨우 먹고살겠죠?! 아버지의 잘난 지게질 때문에 말입니다!"

노엘이 거세게 토해내던 을분이 사그라들고 먹먹한 슬픔 속에 흐느끼다 제풀에 지쳐 멈출 때까지 아버지는 묵묵히 노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들아.. 지금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저 썰매 타는 사람들보다 내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께서는 저들보다 나를 더 인정해 주실 거야."

가라앉았던 노엘의 분노가 다시 거세게 일어났다. 노엘은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초라한 지게꾼의 삶이 뭐가 행복하단 말입니까?! 누가 봐도 저렇게 잘 나가는 사람들이 성공한 삶이 맞잖아요! 아버지처럼 고달픈 삶을 더 인정하는 신이라면, 저는 그 따위 신 믿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얘야.. 저기 보이는 사람들이 비싼 썰매를 타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도 우리 못지않게 무거운 무게를 감당하고 있어.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짊어진 무게가 훨씬 가벼울 게다... 지금은 내 말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너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게야..."




노엘은 눈을 떴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햇살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센 폭풍우는 물러났고, 세상은 온전한 고요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노엘은 등 위에 두텁게 쌓인 눈을 밀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요엘은 아직 의식이 없었지만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혹독한 폭풍우 속에서 정신을 잃었지만 거세게 바람이 분 덕에 눈에 완전히 파묻히지 않았고, 요엘을 품고 엎드려 있었기에 노엘과 요엘 두 사람의 체온이 서로에게 전해지면서 저체온증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노엘은 지게를 살펴보았다. 눈 속에 깊이 파묻히긴 했지만 지게에 단단히 묶인 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실려 있었다. 노엘은 옅은 안도감과 함께 진한 피로감을 느꼈다.

'요행히 살아남았다만... 기력이 하나도 없구나.. 저 지게를 눈에서 파내고, 짊어지고.... 또 꾸역꾸역 걸어야 하는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노엘은 멍하니 눈에 덮인 짐을 바라보다 아래를 내려보았다. 요엘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순간 무기력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게 버거운 짐이었다. 어깨에 짊어져야 할 지게도, 눈앞에 잠들어 있는 요엘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차디찬 눈으로 두텁게 뒤덮여, 끝없이 이어지는 대지도, 그렇게 나아간 끝에 만나게 될 아내와 딸도... 모두가 견디기 버거운 짐으로만 느껴졌다. 노엘은 여기서 그 모든 짐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눈에 파묻혀 폭풍우를 견뎌냈던 몸은 차갑다 못해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통증은커녕 미세히 부는 바람조차 감지되지 않는 몸이 오히려 홀가분할 지경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기이한 환희 속에서 동사하게 되리라. 노엘은 길 위에서 얼어 죽었던 선임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혹한의 땅에서 가혹한 노동 끝에 죽는 자들을 위해 신이 베푸는 작은 동정심. 죽는 순간만큼은 모든 통증이 마비되어 황홀경 속에 끝을 맞이할 수 있는 축복. 노엘은 그 축복을 맞이하고픈 충동에 강하게 휩싸였다. 그때였다.

"워메... 겁나 지독한 폭풍우였구먼... 자네들은 괜찮은가?"

나이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노엘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머지않은 곳에서 웬 노인 한 사람이 지게를 짊어지고 따스한 눈빛으로 노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행색은 기이했다.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얼굴은 샘물처럼 맑아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고 몸은 비쩍 말라 보였지만 힘이 넘쳐 보였다. 노엘보다 얇은 털옷을 입고 있었는데 별로 추워 보이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노인의 지게였다. 한창 힘이 넘치는 마흔 초반의 노엘보다 훨씬 많은 짐을 실었는데도 노인의 지게는 안정감이 넘쳤고, 노인은 마치 아무런 짐도 짊어지지 않은 사람인 마냥 편안해 보였다. 노인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지게를 벗어 작대에 걸쳐 세워두고 말했다.

"어서 일어서게나. 차가운 눈 속에 계속 주저앉아 있으면 몸이 굳어져서 더 일어나기 힘드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요."

노인은 끌끌 혀를 차더니 지게에서 물병을 꺼내서 노엘에게 다가왔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약해서야 쓰겄는가... 자 이거 마시고 기운 차리게."

노인에 뚜껑을 열어 건네준 물병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구수한 향내가 풍겼다. 노엘은 정신없이 물병의 물을 마셨다. 이름 모를 차를 우려낸 듯 은은하지만 깊은 맛이었다. 노엘의 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면서 팔다리에 힘이 돌아오고, 시야가 핑핑 돌며 어지러웠던 증세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노인은 쓰러져 있던 요엘의 팔다리를 주무르더니 요엘의 입에도 조금씩 물을 흘려 넣어주었다. 요엘은 무의식 중에 물을 받아 마셨다. 점점 요엘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더니 잠시 후 의식을 되찾았다.

"마침 내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길 망정이지. 자네들 여기서 얼어 죽을 뻔했구먼."

"덕분에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노엘은 겨우 몸을 일으켜 눈에 파묻힌 지게를 향해 다가갔다. 지게 위에 덮인 눈을 걷어내고 지게를 바로 세운 뒤 빠진 짐이 있는지 점검했다. 대부분의 짐들은 지게에 잘 묶여 있었지만 워낙 강하게 불어닥친 폭풍우 바람을 정면으로 받아내서 그런지 지게의 이음새가 헐거워져 있었고 몇몇 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노인이 다가와 지게를 살펴보았다.

"이 상태로 지게를 짊어지면 위험하네. 갑자기 지게가 부서지는 난처한 일이 벌어질 거구먼. 내 수리 도구를 가져옴세. 우선 짐들을 다 내려놓고 있게나."

노엘이 지게에서 짐을 내리는 사이에 노인은 지게에서 끈과 망치를 가져와 지게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헐거워진 부분을 망치로 두들겨 맞추고 끈으로 다시 단단하게 묶는 노인의 손놀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노인의 손을 거친 지게는 방금 새로 만든 물건처럼 탄탄해 보였다. 노인은 요엘의 지게도 손을 본 뒤에 물었다.

"그런데 자네들은 쓸데없는 짐들이 왜 그리 많은가?"

노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쓸데.... 없는... 짐이라니요?

노인은 바닥에 놓인 망원경을 발로 툭 차며 말했다.

"지게꾼이 웬 망원경을 들고 다니나 싶어 물었네."

"아. 그거요. 도적이나 들짐승이 있는지 미리 살펴보기 위해 챙긴 것입니다. 멀리서 발견하면 피하기도 쉽잖아요."

노인이 폭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지게를 짊어지고 가느라 바쁜 지게꾼이 망원경으로 주위를 살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망원경으로 도적이나 들짐승을 발견했다고 해도 피할 수나 있겠나. 도적들은 자네들보다 훨씬 좋은 망원경으로 주위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자네를 발견하면 빠르게 습격해 올 것이고... 들짐승들은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먼 곳에서부터 자네들의 냄새를 맡고 뒤쫓아 올 것인데... 자네 망원경으로는 위험을 발견해도 늦기는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어르신...."

"내 말 믿게나. 짐을 줄여서 한 시라도 빨리 위험지역을 벗어나는 게 더 낫다네. 위험이 뭐가 있는지 살피며 가다가는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어."

노엘은 손에 든 망원경을 보며 주저했다. 들고 다니기에 제법 무게가 나가긴 했지만 위험을 미리 피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큰맘 먹고 거금을 들여 산 물건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말대로 망원경을 실제로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다. 버리기엔 아까웠지만 지금처럼 기력이 많이 떨어진 몸 상태를 봐서라도 두고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 말씀이 맞네요. 어르신께 드릴까요?"

"그딴 장난감 필요 없네. 자네들 소지품이나 다 펼쳐보게. 얼핏 봐도 쓸데없는 잡동사니들로 가득하구먼."

노엘과 요엘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들의 소지품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노인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니. 지게꾼이 장검은 왜 들고 다니는가? 도적들과 한 판 싸우기라도 할 작정인가.. 으이구...도적이 나타나면 칼을 휘두르기는커녕 벌벌 떨고만 있을 사람들이 뭔 장검을... 차라리 귀중품을 건네주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현명하지.. 칼은 그들을 도발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어.. 그리고 이 갈고리는 또 왜 있어? 절벽을 지나갈 때 안전 도구로 쓰려 했다고? 허허... 절벽을 만나면 좀 힘들어도 돌아가야지 지게를 짊어지고 뭔 절벽을 지나가... 내 원... 아니... 뭔 비상식량은 이리 많이 챙겼디야.. 가는 도중에 만찬이라도 헐 생각이었는가? 너무 많이 먹고 지게를 짊어지면 체하네. 적당히 먹고 움직여야지.. 그리고... 이건 또 뭐여?"

노인이 자루를 풀자 황금색 돌멩이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노엘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가다가 주운 돌멩이입니다. 황금일지도 몰라서 들고 왔어요. 저희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노인께도 몇 개 드리겠습니다."

노인은 잠시 노엘을 바라보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우하하하하.. 고맙네. 아주 고마워. 이렇게 심성이 고운 젊은이들을 보았나. 클클.. 황금도 기꺼이 나누어주려 하다니 참 대단한 사람들일세. 이게 진짜 황금이었다면 내 절이라도 올릴 뻔했지 뭔가...하하하"

노엘은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다 겨우 대답했다.

"그럼... 이게.... 황금이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노인은 웃으며 망치를 들어 황금색 돌멩이를 내리쳤다. 돌멩이가 풀썩 깨지면서 악취가 풍겼다.

"이건 사향소의 똥일세. 굳어지면 언뜻 보아 황금처럼 보이기에 욕심 많은 이들이 황금으로 착각하는 일들이 간혹 있다고 들었네만...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네 그려. 하하하하"

노엘은 맥이 탁 풀렸다. 처음 이 돌멩이들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가슴 설렜던가. 자루에 가득 담아 들어 올렸을 때 느껴진 묵직한 무게감이 벅찬 기대감을 주었다. 돈으로 바꾸면 얼마일까. 아내가 간절히 바랐던 새 오두막을 지을 수 있을지 몰라. 길을 걸으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어쩌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면 이 자가 내 황금을 훔쳐갈까 자신도 모르게 경계했다. 그런데 이 돌멩이들이 황금이 아니라 똥이었다니... 허탈감과 함께 부끄러움이 물씬 밀려왔다.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젊을 때는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내가 말한 것들은 모두 버리게나. 다 쓸데없는 짐이야."

노엘과 요엘은 노인의 말대로 버릴 짐들을 버린 뒤 나머지 짐을 지게에 실었다. 노엘은 요엘의 짐 중에 무거워 보이는 것을 자신의 지게에 옮겨 실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노인이 말했다.

"왜 자네는 저 친구보다 더 많은 짐을 짊어지는가?"

"이 친구가 몸이 약하고 아직 지게 일에 미숙해서 제가 도와주는 겁니다."

노인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에끼! 이 사람아! 그건 저 친구를 돕는 게 아니라 망하게 하는 일일세! 평생 자네 곁에서 도움만 받으며 살도록 만들 텐가? 자기 짐을 끝까지 책임지는 경험이 쌓여야 진짜 지게꾼이 되는 것을.... 자네는 저 친구의 성장을 막고 있어!"

노인은 노엘의 짐에 더 실린 물건들을 꺼내 요엘의 지게에 실었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남에게 의지하려는 습관을 들이면 못 쓰네. 힘들어도 자기 짐은 스스로 짊어져야지... 지게꾼은 동료에게 힘이 되려 힘써야지, 부담스러운 짐이 되어선 안 되네. 명심하게."

요엘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엘과 노엘은 지게를 짊어지고 용을 쓰며 일어섰다. 노인이 준 찻물을 마시고 기력이 조금 회복되었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래도 노인이 함께 있으니 든든했다.

"자. 갈길이 머니 어서 출발하세나. 내 뒤를 잘 따라오게."

자기 지게를 짊어진 노인은 쾌활하게 웃으며 출발했다. 노엘과 요엘은 노인의 뒤를 뒤따랐다. 노인이 지게를 짊어지고 걷는 모습을 보며 노엘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노인은 두 사람보다 훨씬 많은 짐을 지게에 실었는데도 허리를 많이 구부리지도 않았고 힘도 덜 들이는 것 같았다. 지게의 흔들림에 맞추어 노인의 몸도 경쾌하게 리듬을 타며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나아가건만 노인의 발은 눈 속을 파고들기보다 눈의 탄력을 타고 가볍게 움직이고 있어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노인이 눈을 헤집고 만들어주는 길을 따라가면서도 두 사람은 노인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결국 노엘이 다급하게 노인을 불렀다.

"어르신!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

노인은 돌아보며 환히 웃었다.

"허허... 젊은 친구들이 이리 허약해서 어디 지게일을 계속 하겄나.. 허허허"

노엘은 혀를 내둘렀다.

"헉헉.. 어르신.. 지게를 지는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하면 어르신처럼 지게를 잘 짊어질 수 있나요?"

노인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게꾼에게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닐세. 무엇보다 우선 올바른 자세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네. 호흡도 못지않게 중요하고. 올바른 자세와 호흡을 찾은 뒤, 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네.. 올바른 자세를 찾으려면 몸을 통해 전해지는 지게의 목소리에 잘 귀 기울여야 하고...."

순간 노엘은 멍해졌다. 열여섯 생일날 아버지가 했던 말이 노인의 입에서 다시 반복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인은 이어서 말했다.

"걷다 보면 지게의 무게중심이 매번 움직이지. 그에 맞추어 내 몸도 움직여야 혀. 눈 위를 걸을 때 발밑에 느껴지는 눈의 저항도 항상 달라진다네. 그 변화에 맞추어 내딛는 발걸음의 리듬을 정하는 거여. 지게질은 지게와 나와 대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한 바탕 춤인 것이여... 자. 내가 지게를 짊어지고 가는 것을 잘 살펴보라고."

노인은 노엘과 요엘 사이에서 조금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노인의 몸놀림을 유심히 살펴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몸으로 지게 무게 중심의 변화를 더욱 민감히 감지하면서 발을 디딜 때 느껴지는 저항력의 변화에도 집중하였다. 지게와 몸, 그리고 대지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었고 그렇게 만든 리듬에 맞추어 몸을 놀리다 보니, 점차 지게질이 고된 노동이라기보다, 지게와 함께 추는 아름다운 춤과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게의 흔들림과, 들이마시고 내뱉는 호흡, 허리와 다리의 몸놀림이 조화를 이루며 어떤 리듬감이 형성된 순간, 두 사람은 지게질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갔다. 그 이후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시간의 흐름마저 멈춘 느낌이었다. 몸에 스며드는 추위도, 남은 여정에 대한 막막함도,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언제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몰라 들었던 불안함과 염려도.. 모두 사라졌다. 오직 하얗게 빛나는 대설원 위에서 경쾌하게 움직이는 지게와 그에 맞추어 춤을 추는 듯 신나게 움직이는 육신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순전한 몰입, 경쾌한 질주... 두 사람은 그렇게 지게와 더불어 신나는 놀이 한 판을 벌이듯, 신명 나는 춤 한 사위를 펼치듯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려... 그렇게 걷는 것이여. 허허허. 이제사 제대로 된 지게꾼이 되었구먼..허허허"

멀리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이 든 노엘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노인은 어느새 두 사람과 아득히 떨어진 저 멀리에서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노엘은 경외감에 휩싸여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그리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는데도 노엘과 요엘이 도저히 뒤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과 점점 거리가 벌어지던 노인은 저 멀리 대지의 끝자락에서 한 점으로 변하더니, 두 사람의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어느새 하늘은 황혼으로 물들었다. 저 멀리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따스한 저녁을 먹을 수 있으리라. 노엘과 요엘이 내딛는 발걸음에 더욱 힘이 넘쳤다.

'그 노인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혼이었을까?'

노엘은 생각했다. 그럴 리 없었다. 분명 노인이 준 물을 마셨고 노인이 직접 노엘과 요엘의 지게를 수리했다.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지게일로 평생을 보낸 어느 지게꾼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노엘은 노인이 아버지였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신께서 보내신 천사일지도 모르지...'

갑자기 요엘이 말했다.

"선배님. 저기 좀 보세요."

요엘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썰매 하나가 전복되어 부서져 있었다. 썰매를 끌던 개들은 어디론가 도망쳐 사라졌고 썰매에 실린 짐들은 산산이 흩어져 있었다. 수레 옆에 어떤 사내가 홀로 널브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지게를 세워 놓은 뒤 그에게 다가갔다.

"여보시오. 정신 좀 차려보시오."

".... 음...대체...뉘기야.. 으음.... 이 XX야! ..꺽...나를... 건드리지... 마!"

사내는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요엘이 사내의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아이구.. 술 냄새... 이보시오! 여기 누워있으면 큰일 나요. 어서 일어납시다."

사내는 버럭 화를 내며 요엘의 팔을 뿌리쳤다. 요엘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아이.. 씨! 내버려... 두라니..까!! 이... 잡.. 것들아!"

황당한 표정이 된 요엘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사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크흑.. 흑... 자기야..... 라헬아.... 내가 잘못했어..... 제발. 제발 내게 다시 돌아와 줘.. 크흐흐흑."

오열하던 사내는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노엘이 사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내가 떠나간 게요? 아내 찾으러 왔다가 이 봉변을 당한 거요?"

갑자기 사내가 분통을 터뜨렸다.

"마누라는 개뿔! 라헬은.... 쓰레기 같은 내 본처와 달라!! 얼마나.. 마음이... 곱디 고운.. 여자인데! 감히... 누구와... 비교해! 끄윽.... 끅.....우웩!"

사내가 바닥에 구토했다. 노엘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사내는 얼마나 많이 먹고 마셨던지 사내의 입에서 술과 함께 음식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요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내가 싫어서 다른 여자를 몰래 만났는데 그 여자마저 떠나가 버린 모양이네요... 에휴.. 저리 고급 썰매를 끌고 다니는 거 보면 잘 사는 분 같은데 왜 저렇게 복잡하게 사는 건지...."

노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서 저 사람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네. 어서 마을로 가세. 마을로 가서 구조대를 보내달라 요청해야지."

두 사람은 지게를 짊어지고 다시 마을로 출발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하루를 돌아보았다. 많은 일이 있었다. 눈보라 속에서 심신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걸었다가, 세상을 다 부술 듯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만났었다. 그러다 신비로운 노인을 만났고 노인을 통해 지게질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만났던 취한 사내... 노엘은 이 모든 일이 우연 같지 않았다. 노엘의 뇌리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저기 보이는 사람들이 비싼 썰매를 타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도 우리 못지않게 무거운 무게를 감당하고 있어.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짊어진 무게가 훨씬 가벼울 게다...'

노엘의 입가에 여름 바람처럼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노엘은 어깨에 멘 지게 줄을 힘껏 거머쥐었다. 등에 전해지는 지게의 움직임이 마치 춤을 추자는 듯 부드럽게 요동쳤다. 그 진동에 맞추어 노엘의 발은 경쾌하게 둥둥 북을 울리듯 대지를 내디뎠다. 그렇게 노엘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이 기다리는 마을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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