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에서 서핑을 / Ep 1. 지친 남자
바람이 분다. 소금기를 머금고 뜨겁게 달아오른 해풍이 온몸을 휘감는다. 하얀 포말을 흩날리며 일어선 파도들이 짙푸른 벽을 세우고 해변을 향해 몰려온다. 앞선 파도들이 해변가에서 무너져 사그라들자, 다음 파도가 깨어나려는 듯 저 멀리 푸른 바다가 점점 부풀어 오른다. 저마다 조악한 보드를 옆구리에 낀 아이들이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바다에 보드를 던지고 그 위에 몸을 실은 뒤, 활기차게 팔을 저으며 장차 일어설 파도를 향해 나아간다. 카리브해의 강렬한 태양빛이 물에 젖은 아이의 검은 피부에 부딪쳐 반짝인다. 보드에 올라탄 아이의 몸이 부푼 바다 위로 진입한다. 순간, 파도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노성을 터트린다. 거대하게 일어나는 파도의 정점에서 아이는 보드 위에 몸을 일으키고 거침없이 질주한다. 조그만 아이 따위 가볍게 떨쳐내겠다는 듯, 파도가 용트림을 치며 거세게 출렁거렸지만 아이를 태운 보드는 휘몰아치는 파도의 등 위를 이리저리 활강하며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쏴아 쏴... 파도의 노래 사이로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이 메아리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솟구친다.
라자로는 파도를 타는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가 입은 셔츠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다.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것 같다. 라자로는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생각했다.
'의뢰인이 요청한 서류는 우편으로 보냈고.... 변호사님은 오후 1시에 도착한다고 하니.. 공증 사무소에는 늦어도 12시까지 가야 미리 서류를 검토할 수 있겠지... 빌어먹을.. 오늘 점심도 굶어야겠구나...'
허기가 물씬 밀려왔다. 오전 동안 외근으로 땡볕 속에서 정신없이 일했다. 의뢰인의 집을 방문하여, 서류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우체국으로 달려가서 서류를 발송한 뒤 서둘러 공증 사무소로 출발했다. 오후에 라자로는 페레르 변호사가 도착하기 전에 공증사무소에 가서 의뢰인의 임대 계약 서류를 검토하여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야 하고, 페레르가 도착한 이후에는 페레르가 공증인과 나누는 대화를 속기로 메모하며 법률 사무소로 복귀한 이후 처리할 업무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공증 사무소의 일이 끝나면 변호사와 함께 법률 사무소로 돌아와 각 부서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류들을 검토하고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고, 완료된 서류들을 각 서류철에 빠짐없이 분류하여 정리한 이후에, 내일 우체국으로 보낼 우편과 소포들을 포장하고 나서야 오늘 할 일이 끝날 것이었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점심이라도 먹으려면 한 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이동해야 했는데, 오늘도 라자로는 해변에서 파도를 타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홀린 듯 멈춰 서고 말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 시원하게 밀려오는 파도, 홀가분하게 서핑을 즐기는 아이들....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지금 가지 않으면 늦는데....'
초조함이 엄습했지만 라자로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라자로의 시선은 파도 위에서 환하게 웃는 아이들에 붙들려 있었고, 그의 마음은 해변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라자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 페레르가 호통을 치겠구먼... 정신 차리자...'
라자로는 애써 발을 떼어 공증 사무소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해변을 치는 파도 소리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자로는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걷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서류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이 무거웠다. 따가운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렬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습기로 호흡하기가 버거웠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핑 돌았다. 땀이 쿠바의 우기에 만나는 폭우처럼 라자로의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라자로는 짐을 잔뜩 짊어지고 채찍질에 허둥지둥 달음박질하는 나귀처럼 황망하게 공증 사무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젠장할! 그 집은 아버지가 내게 물려주신 거란 말이요!! 도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을 거요!?"
에스테반의 성난 목소리가 공증 사무소에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내 아버지가 직접 지었고! 그 집에서 내 가족이 십 년간 살았소!! 자그마치 십 년이오! 누가 봐도 내 집인데! 왜 그 개 뼈다귀 같은 놈에게 넘어갈지도 모른고 말하는 게요!"
벌겋게 달아오른 에스테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투우 소처럼 우락부락한 근육들이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 꿈틀거렸다.
"제발..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시오..."
하얗게 질린 라자로가 겨우 말했다.
"설명은 됐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나 말하시오! 거금을 들여 의뢰를 맡겼더니 젠장맞을... 무슨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는 거요!"
"그.. 그러니까.. 그 집을 에스테반 님의 아버지께서 지으셨고 공증을 받았다는 증명서를 만든 다음에...."
라자로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지만 에스테반의 분노는 한층 가열차게 끓어올랐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후 고조된 습기에, 한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더해지면서 사무실은 마치 습식 사우나에 들어선 것처럼 후텁지근했다. 맥없이 돌아가는 선풍기가 공기를 휘젓고 있었지만 더위를 밀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젠장!! 당신은 어제까지도 그 빌어먹을 증명서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잖소! 왜 이제 와서 그 증명서를 들먹이냐는 말이오!"
"그게.... 그..."
"우리 사무소 직원이 일처리를 미숙하게 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더듬거리는 라자로의 말을 끊고 페레르 변호사가 말했다. 차분하면서도 음침한 목소리였다.
"직원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요! 아바나(Havana)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변호사 사무소라서 일을 맡겼건만.. 이거 완전 엉망진창이지 않소! 자칫하다간 내 집이 넘어가게 생겼단 말이오!"
페레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에스테반 씨. 걱정하지 마시오. 공증 서류 하나만 더 추가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변호사인 내가 요청하면 서류 제출 날짜를 연기할 수 있도록 여기 계신 공증인께서 작업해 주실 거요. 그렇지요?"
페레르는 빙긋 웃으며 옆에 앉은 공증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공증인이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요.. 아무튼 에스테반 씨. 쿠바에서는 어떤 사실이든 국가의 공증을 받아야 합니다. 당신 아버지가 직접 집을 지었고, 당신 가족이 십 년 넘게 그 집에 살았던 것이 사실이어도 그 사실을 국가가 공증했다는 서류가 없으면, 그 집에 대해 당신은 물론 당신 아버지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어요. 그 서류를 만들려면 여기 계신 페레르 변호사의 도움이 꼭 필요할게요. 일반인이 만들기 어려운 법적 서류이니까요."
에스테반의 우람한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렇게 중요한 서류라면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게요! 미리미리 준비해 놓을 것이지, 중요한 재판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왜 이제야 말해서 이렇게 사람 복장을 뒤집어 놓느냔 말이오!"
페레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리 직원의 실수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지요. 하루빨리 공증 서류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재판 일정에 맞추어 서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추가 인력을 더 투입해야 하기에 페레르 씨가 좀 더 금액을 내주셔야 할 듯합니다."
"뭐요! 이... 이런.. 우라질 놈들을..."
에스테반이 폭발하기 전에 페레르가 재빨리 말했다.
"진정하시고 내 말 들으세요. 우리 직원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니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작업을 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추가로 내셔야 했을 돈입니다. 우리 직원 실수로 매우 적은 금액만 추가하시면 되시니 에스테반 씨에게도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진정하시죠. 싫으시다면 의뢰를 취소하시오. 물론 그 경우에도 취소 수수료는 물으셔야 할 것이오."
에스테반이 씩씩 거리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수수료가 얼마가 됐든 지금 당장 취소하고 싶지만... 재판이 코 앞이라 내가 참는 거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일 똑바로 처리하쇼! 그리고 이봐 당신!"
에스테반이 라자로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 사과는 내가 확실히 받아야겠어! 당장 내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쇼! 당신 때문에 내가 이 지랄 맞은 상황에 빠졌잖아!"
라자로는 덫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서류를 빠트린 것은 라자로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주일 전에 페레르가 확인하라고 지시한 서류 목록에는 에스테반의 주택 공증 서류가 없었다. 페레르가 일부러 누락시킨 게 분명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다. 페레로가 고의로 몇 가지 서류를 누락하여 라자로에게 업무를 지시했고, 업무 마감일이 임박해서 누락된 서류들을 확인한 의뢰인이 격분했고, 의뢰인의 분노는 업무 담당자인 라자로에게 쏟아졌고, 라자로가 진땀을 흘리며 의뢰인의 분노를 감당하고 있을 때 페레르가 해결사인 양 등장했다. 페레로는 거부할 수 없는 해결방안을 말하며 넌지시 추가 금액을 요구했고 의뢰인은 임박한 마감일 때문에, 정상적으로 일이 진행되었으면 내지 않아도 될 추가 금액을 어쩔 수 없이 지불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라자로는 덜떨어지고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했고, 페레르는 부하 직원의 실수를 무마하고, 문제가 생긴 의뢰를 해결하는, 지혜롭고 자애로운 상사로서 빛나고 있었다. 이번 일도 악마 같은 페레르의 술수로 벌어진 일이리라... 라자로는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사태의 원흉은 페레르임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라자르가 페레르를 걸고넘어지면 겨우 수그러든 에스테반의 분노가 폭발할 것이 분명했다. 페레르도 기름진 뱀장어처럼 능글능글한 말들로 교묘하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신이 지시한 업무 목록에 없었다고 해도 이렇게 중요한 문서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한 지 십 년이 넘어가는 라자로가 스스로 챙겼어야 했다며 질책할 것이 뻔했다. 라자로는 이를 악물었다. 모멸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가누며 무릎을 꿇고 에스테반에게 머리를 숙였다.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시오....."
라자로가 사과를 한 이후에도 에스테반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분노를 토해냈다. 한참 동안 욕설과 비난을 라자로에게 쏟아내던 에스테반은 공증사무소 문을 박차고 나가며 외쳤다.
"내가 용서하는 것은 이 번 한 번 뿐이오! 다음에 또 실수하면 가만 안 두겠어!"
에스테반이 사라지고 나서 폐허와 같은 적막감이 공증 사무소에 흘렀다. 공증인이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허어... 목청 한번 요란하구먼... 아무튼 페레르 씨. 에스테반이 추가 요금을 내면 약속대로 삼 분의 일은 내 몫이오."
"걱정 마시오. 차질 없이 드리겠소. 어이. 라자로."
라자로는 진이 빠진 얼굴로 페레르를 바라보았다. 페레른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일을 똑바로 처리해야지. 내가 언제까지 자네가 싼 똥을 치워야 하는 거냐고. 내 원... 앞으로 일주일 뒤면 서류 제출 마감일이니 야근을 해서라도 서류를 마련해 놔. 또 빠트리면 내가 더는 덮어주지 못해. 에스테반 성격 봤지? 일이 잘못되면 자네 콧등이 무사하지 못할 거야. 명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