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Havana (2)

쿠바 아바나에서 서핑을 / Ep 2. 파도의 부름

by 통나무집

해가 저물고 짙은 땅거미가 내릴 때에야 라자로는 일을 마무리하고 사무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모멸감과 피로감이 묵직하게 어깨를 짓눌렀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라자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레만도 못한 삶이구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어둑어둑해진 아바나(Havana)의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졌다. 어디선가 흥겨운 라틴 음악이 흘러나왔다.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음식점 창문 너머로 관광객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카리브해의 해산물 요리를 먹고 있었다. 은은히 풍겨오는 매콤한 향이 허기를 날카롭게 자극했다. 라자로도 저들 사이에 앉아서 저녁을 먹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내와 딸을 부양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에 빠듯한 월급이다. 함부로 외식하면 생활비가 간당간당해진다. 라자로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관광객들이 자주 다니는 대로변을 지나 라자로의 아파트가 있는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철골 구조물이 훤히 드러난 건물들이 드러났다. 가로등은 깨져 있고 건물의 창문들에서 새어 나오는 전등도 흐릿해서 골목은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개 짓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어느 건물에서는 부부가 격한 싸움을 시작했는지 욕설과 폭언이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 더욱 우울해진 라자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신의 아파트로 향했다.

라자로의 집은 뒷골목을 한참 동안 들어가야 등장하는, 허름한 아파트 8층에 있었다. 제법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그 아파트는 오래전에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다. 무더위 속에서 언덕의 급경사를 헉헉 거리며 올라온 라자로는 숨 가쁘게 아파트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고, 집 현관에 도착할 무렵에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뒤 현관문을 여니 한껏 볼륨을 키운 라디오에서 팝송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누구더라.. 백스트리트 보이즈(Backstreet Boys)였던가.. 아니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 딸이 열광했던 외국 가수들의 이름을 라자로가 떠올리고 있는데 아내 시오마라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셀리아! 라디오 볼륨을 줄이라니까! 할머니가 불편해하시잖니!!"

딸이 퉁명스럽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씨.. 내버려 두라고!"

"야 이 말할 년아! 아버지도 오셨는데 시끄럽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라디어 못 꺼!"

"엄마! 내 집인데 라디오도 내 맘대로 못 켜?!"

"이 년이! 또 말대꾸를 하네! 이게 왜 니 집이야?! 너 혼자 사니!? 할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잖아!!"

"아 그러니까 이사를 가자구! 이 좁아터진 아파트 지긋지긋해! 내 방을 달라구!!"

"돈이 어딨는데! 니가 돈 버니?!"

"씨X... 울 아빠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는 거야?! 내 친구 카밀라는 자기 방에서 TV도 본다구! 우리 집은 TV도 없어서 마이클잭슨 오빠 얼굴도 맘껏 못 보는데 라디오라도 크게 들으면 안 돼?!"

"헛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라디오나 꺼! 그리고 숙제는? 저녁 먹고 나서는 숙제한다고 했잖아!"

"아 몰라! 김 다 샜어! 오빠 노래 들으며 숙제하려 했는데 엄마가 방해하고 있잖아!"

"이 잡 것이!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네 년이 저녁에 숙제한다고 약속해서 오후 내내 친구와 놀도록 허락해 줬더니 뭐가 어째? 당장 식탁으로 가서 숙제하지 못해?! 또 담임 선생님에게 혼날 거야?!"

"상관 안 해! 그 담탱이! 공부 잘하는 학생만 이뻐하고 내게는 쌍심지 켜고 사사건건 핀잔주고 간섭한다구. 그런 꼰대 말을 내가 왜 들어야 해?!"

"니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허구한 날 노래한다고 싸돌아다니니까 선생님도 속이 타시는 거지. 니가 공부만 열심히 해봐라. 학교에서 너에게 뭐라 잔소리할 사람이 누가 있겠니?"

"아니! 노래가 뭐가 어때서!! 엄만 글로리아 에스테판 모르지? 그 언니가 노래로 얼마나 성공했는지 알아? 마이애미로 넘어가서 얼마나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지 아냐고?"

"에스테판이고 개스테판이고 간에.. 너는 셀리아지 가수 글로리아가 아니잖아! 음악만 하면 다 성공할 수 있는 줄 아니? 엄마를 봐! 엄마도 너만 할 때 살사 댄스에 미쳐서 학교도 그만뒀어. 엄마도 잘 나갈 줄 알았다고! 그렇게 10년을 살면서 겨우 깨달은 게 뭔지 아니? 냉혹한 예술 세계! 나보다 훨씬 춤을 잘 추는 사람도 밥 쫄쫄 굶으며 비참하게 사는 게 바로 예술 세계야! 넌 다를 것 같니?"

"그래서 어쩌라구?! 나는 하지 말라고?! 엄마는 실컷 해 놓고서는 나는 하지 말라는 거야? 더구나 이 빌어먹을 쿠바에선 박 터지게 공부해 봤자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인생밖에 못 되잖아! 지금 아빠처럼!!"


짜악


셀리아가 벌게진 뺨을 부여잡고 시오마라를 노려보았다. 셀리아의 뺨을 휘갈긴 시오마라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고함을 질렀다.

"이 망할 년! 니 아빠가 너를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니 년이 그딴 말을 지껄여! 너.. 당장 나가! 나가버리라고!"

셀리아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시오마라를 쏘아보던 셀리아는 의자에 널브러진 웃옷을 거칠게 낚아채더니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셀리아.. 이 밤에 어디 가려는 게냐?"

라자로가 당황하며 딸의 팔을 붙잡았지만 셀리아는 거세게 라자로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요!! 어차피 나는 골칫덩어리밖에 안 되잖아! 나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잖아!"

시오마라가 악에 받쳐 외쳤다.

"가도록 내버려 둬요! 밖에 나가서 고생해 봐야 엄마 아빠 귀한 줄 알지! 나가! 나가라고!"

셀리아가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며 소리쳤다.

"씨X!! 다신 나 못 볼 줄 알아!!"

셀리아는 울면서 아파트 계단을 뛰어내려 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파트 내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시오마라는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흰 담배 연기가 아내의 한숨과 함께 밤하늘로 흩어졌다. 저 편에 닫힌 방문 뒤로 어머니가 쿨럭쿨럭하며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자로는 이 모든 풍경이 자신을 향해 사정없이 오그라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다. 라자로는 흔들리는 몸을 겨우 가누면서 아파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보이는 모든 세계가 흐느적흐느적 요동쳤다. 그는 무작정 걸어갔다. 어둠에 잠긴 뒷골목을 지나 환한 가로등과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대로변을 정신없이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라자로는 홀린 듯 밤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해변으로 내려가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시원한 바람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쏴아 쏴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나자로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가족에게 속박된 삶을 못 견뎌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눈은 언제나 바다를 향해 있었다. 보드를 타고 파도 위를 자유롭게 질주하는 순간만을 사랑했던 아버지. 바다에 나가지 않을 때는 술에 빠져 취기 속으로 깊이 자맥질하던 아버지... 유년기에 라자로는 파도를 타는 아버지를 보러 종종 해변으로 나갔지만, 어릴 적부터 병약했던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뛰어들지 못했다. 그런 라자로를 아버지는 한심하게 여겼고, 당신의 아들이 당신처럼 파도를 향해 담대히 나아가기는커녕 겨우 얕은 물에서 물장구나 치는 것에 만족하자, 라자로를 아들이 아니라 타인처럼 대했다. 라자로가 열여섯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홀연히 사라졌다. 모든 속박과 책무를 훌훌 벗어던지고, 집시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이들과 더불어, 파도를 타기에 좋은 바다를 찾아 떠나버린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증오스러웠고, 그처럼 무책임한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아 라자로는 한사코 바다에서 멀어지는 삶을 선택했다. 가족을 버리고 바다로 떠나버린 아버지와 달리, 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견실하게 가족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라자로는 아버지의 심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모든 무게를 집어던져 버리고, 가볍고 홀가분하게 파도 위를 날아가듯 넘나드는 삶... 라자로는 낮에 보았던 해변의 풍경을 떠올렸다. 찬란히 빛나는 햇살, 푸르게 넘실거리는 바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경쾌하게 바다 위에서 파도를 타는 아이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목소리, 증오로 가득 찬 고함 소리는 소멸하고, 오직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소리와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들만 가득한 공간.... 몸과 마음을 옥죄이는 아귀지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오직 평온하고 자유롭기만 한 풍경들....

순간, 라자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절박하게 파도를 타보고 싶어졌다. 어릴 때 보았던 아버지처럼, 낮에 목격했던 아이들처럼 한 없이 홀가분하게, 한 조각 보드에 몸을 의탁하여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 위를 활강하면서, 마음껏 바다를 누비고 싶어졌다. 라자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꺼려했던 파도타기인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쿠바 사내로구나.. '

라자로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우선, 이번 주말에 보드를 사서 바다로 가보자. 바다에 나가본다고 별 수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 이대로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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