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에서 서핑을 / Ep4. 가족의 의미
저녁노을이 아바나(Habana)를 붉게 물들였다. 아바나 시내를 거니는 관광객들의 선글라스 위에도,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가게들의 창문에도, 그리고 라자로의 아파트로 향하는 뒷골목 바닥에 고여있는 웅덩이 위에도 황혼은 찬란한 진홍빛으로 번져왔다. 석양으로 가득한 아바나 도심을 걸어가며 라자로는 고민했다.
'아내에게는 어떻게 말하지?...'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느려졌고, 어깨에 짊어진 서핑 보드가 점점 묵직하게 느껴졌다.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바닷물이 신경 쓰였다. 머리와 온몸에 흥건한 바닷물이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햇살에 자연스레 마르기를 바랐지만, 이미 어둑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아바나는 한낮의 열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의 아파트가 서 있는 언덕에 진입했을 때에도 라자로의 머리카락과 옷은 바닷물로 가득했다.
'머리카락과 옷이 여전히 바닷물로 범벅이니.. 내가 서핑을 하고 온 것을 아내가 금방 알아차리겠구나.. 하긴... 이 거대한 보드를 숨길 곳도 마땅치 않으니... 에휴..'
라자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에게 말하지도 않고 거금을 들여 서핑 보드를 샀고 하루 종일 바다에서 놀다가 왔다. 이런 일탈을 아내 몰래 저지를 작정이었다면, 미리 갈아입을 옷을 챙겨 오고, 몸을 씻을 곳과 보드를 숨길 장소를 마련했어야 했다. 그저 돌아오는 길에 젖은 몸이 저절로 마르기만 기대했고, 보드는 아파트 뒤편 적당한 곳에 숨기면 되겠거니 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언덕을 올라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기까지 몸은 마르지 않았고, 10달러나 주고 산 보드를 아무 곳에나 세워 둘 배짱도 없었다. 8층에 있는 현관까지, 커다란 서핑보드를 짊어지고 좁은 계단을 낑낑대며 올라갈 일도 암담했지만, 아내와 딸, 늙은 어머니의 소지품으로 미어터지는 집에 보드를 둘 곳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니 라자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렇게 큰 보드를 들고 좁은 계단을 걸어올라 가면 자칫 잘못했다가는 보드가 부서질 수도 있겠는데... 용케 집 안까지 들고 가도... 어디에 둬야 할까? 거실은 이미 다른 물건들로 가득 찼고... 방은 비좁을 테고.. 베란다는... 건조대와 화분으로 발 디딜 공간도 없고... 보드를 끈으로 묶어서 창문에 매달아 둬야 하나..?'
"라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파트 벽에 보드를 세워두고 한참 고민에 빠져있던 라자로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 시오마라가 뜨악한 표정으로 라자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자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여보... 그게.. 말이야...."
더듬더듬 변명을 시작하는 라자로를 시오마라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오마라의 시선이 바닷물로 흥건한 라자로의 머리카락과 옷, 붉게 상기된 얼굴을 지나 아파트 벽에 세워진 거대한 보드로 향했다. 시오마라는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드를 들고 따라와."
시오마라는 몸을 돌리더니 언덕 아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라자로는 멍하니 시오마라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황급히 보드를 들고 시오마라의 뒤를 쫓아갔다. 언덕을 다 내려가기까지 시오마라는 말이 없었다. 라자로는 침울해졌다.
'이제 어떻게 하지? 보드를 사는 데 10달러나 썼다고 하면... 엄청 화내겠지... 당장 환불하라 할 테고... 보드를 하루도 쓰지 않았으니 환불해 달라고 그 사내에게 무릎 꿇고 통사정하면.... 안 되겠지... 엄청 깐깐해 보이던데.... 에휴....'
뒷골목을 나와서 아바나 도심을 벗어나기까지 말이 없던 시오마라는 해변 근처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 사이를 걸어가다가, 얼기설기 얽은 나무 울타리 너머로 텃밭이 들여다보이는 집의 녹슨 대문 앞에 멈추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오마라를 라자로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시오마라가 들어간 집에는 제법 널찍한 텃밭이 펼쳐져 있었다. 푸릇푸릇한 상추 잎들 사이로 탐스러운 오이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고, 줄지어 세워진 철사를 타고 알알이 맺힌 토마토들이 탐스런 자태를 뽐내며 석양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텃밭 사이에서 어떤 노부부가 보니아토(쿠바식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밭에 쭈그리고 앉아 보니아토를 캐고 있는 할아버지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몸집이 작았지만 팔다리에 잔근육으로 가득한 게 젊었을 때 힘깨나 썼을 듯했다. 아담한 체구의 할머니는 연신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할아버지가 캐서 건네는 보니아토를 손수레에 싣고 있었다. 시오마라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마르타 할머니. 시므온 할아버지. 저 왔어요."
마르타 할머니가 몸을 일으키더니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오마라.. 또 무슨 일로 왔어? 오후에 텃밭 일을 도와주고 집으로 간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뭐 놓고 갔는겨?"
"할머니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그려? 우리 시오마라 부탁이면 뭐든 들어줘야지... 매일같이 와서 우리 노인네들을 챙겨주고 있는디.. 뭐 필요한 게 있는가?"
시오마라는 뒤를 돌아보더니 라자로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라자로는 쭈뼛거리며 서핑보드를 들고 텃밭으로 들어섰다.
"제 남편이 서핑 보드를 샀는데, 저렇게 큰 물건을 저희 집에 둘 곳이 없어서요.. 할머니 텃밭 한쪽 구석에 두어도 괜찮을까요?"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되고 말고. 얼마든지 그렇게 해요... 그런데 저 보드가 비싸 보이는디... 여그 텃밭은 비바람이 다 들이칠 건디... 이런 데다 두어도 괜찮을려나 모르겄구먼.."
그때 마르타 옆에서 묵묵히 보니아토를 캐고 있던 시므온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여그 두면 안 돼. 서핑 보드는 쓰고 난 뒤에 잘 씻어서 바람 잘 통하고 햇볕이 들지 않은 곳에서 말려야 하는 겨."
시므온은 라자로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텃밭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 저그 우물이 있응게, 거기서 보드를 씻게나. 글고 텃밭 뒤에 내 목공 작업장이 있으니 보드는 거기에 두면 될 걸세."
".... 감사합니다.."
라자로는 엉거주춤 서 있었다가 쭈뼛쭈뼛 보드를 들고 우물로 가서 보드를 씻기 시작했다. 시므온이 다가와 라자로가 씻는 보드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이거... 대단히 좋은 물건인디? 어디서 샀당가?"
"해변에 있는 산티아고 서핑 가게에서 샀습니다.... 이렇게 크고 둔해 보이는데... 좋은 보드인가요?
"아. 산티아고? 보드를 참 잘 만드는 사내이지. 허허허.. 내가 젊었을 때 그 친구 보드를 자주 애용했었는데... "
시므온은 라자로의 보드를 만져보더니 두 손으로 들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야.. 이거 진짜 잘 만든 물건일세.. 밸런스도 잘 맞고... 마감도 잘 되어 있고.. 이야.. 이 핀(Fin : 서핑보드의 조타장치에 해당하며 보드의 안정감을 결정함)은 정말 예술인걸? 이거 얼마 주고 샀는겨?"
라자로는 시오마라의 눈치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더니 말했다.
"10... 달러입니다."
시오마라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라자로는 차마 아내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보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므온은 흥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호오? 10달러였다구...? 이 정도 물건이면 적어도 12달러는 할 것인데... 산티아고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먼."
"네? 제게 무지 심술을 부리던데요? 오늘 송장 치우는 게 아니냐며 면박을 주고.. 보드를 부수지 말라고 구박하고..."
"그랬던가? 산티아고 그 친구가 겉보기엔 거칠고 무뚝뚝해도, 속이 깊고 정이 많다네.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자네가 걱정돼서 했던 말들일 걸세. 서핑 초보자가 무모하게 파도에 덤벼들었다가는 진짜 위험할 수 있거든."
"... 그렇군요...."
라자로는 시므온의 말에 언뜻 동의가 되지 않았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시므온은 서핑보드를 라자로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자. 보드는 내 작업장 벽에 세워두게나. 우리 집이 해변과 가까우니 여그 보관하는 게 편할 걸세."
마르타도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영감도 젊었을 때 파도타기에 미쳐 있었다우. 그래서 처음 서핑을 시작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참 많이 쓰이는가 봐요. 그리고 시오마라가 우리 부부를 많이 도와줘서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도울 수 있어 좋네요.. 호호. 여기가 우리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사용해요."
라자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라자로와 시오마라는 마르타가 가득 넣어준 과일과 야채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시오마라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행동에는 이전처럼 냉기가 감돌지 않았다. 아내의 감정이 좀 누그러진 듯하여, 라자로는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여보... 미안해.."
시오마라는 말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라자로는 겨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서핑이 너무 하고 싶어졌어.. 요즘 스트레스가 좀 심해 가지고.... 내가 잠시 정신을 못 차렸던 것 같아.. 10달러는 내가 야근을 해서 어떻게든 다시 채워 놓을게... 미안.."
시오마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깊이 한숨을 내쉰 그녀는 라자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됐어.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이제 신경 쓰지 마."
시오마라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아무런 분노나 실망감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시오마라는 말했다. 라자로는 안도하며 말했다.
"내가 말도 없이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어서 화가 났지? 미안해."
"화가 나기도 했지만..."
시오마라는 라자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당신이 말도 없이 사라져서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을 때는 걱정을 많이 했어. 요즘 당신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고, 집에서는 딸이 말썽만 피우고 해서 당신 요즘 너무 힘들어했잖아. 요새 며칠 동안 당신 안색이 너무 안 좋기도 했고... 책임강이 강한 당신이 집을 나갈 일은 없겠지만.... 당신이 뭔가 안 좋은 선택을 할까 봐 조마조마했어. 그런데 아까 당신이 서핑보드를 옆에 두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보드를 사느라 큰돈을 썼을 것 같긴 했지만... 안심이 되더라. 아까 본 당신 얼굴.. 참 좋아 보였어.. 뭔가 신나 보이고, 후련해 보이기도 하고... 보드를 구매하는 데 10달러나 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좀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동안 당신은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돈을 쓰지 않았잖아. 무엇보다 당신 숨통이 트일만한 뭔가를 찾았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시오마라의 말을 들으며 라자로는 가슴 가득히 따뜻한 기운이 벅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내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여 꼭 끌어안고 싶어 졌지만 아직 아내는 포옹을 허락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라자로는 울음기로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정말.. 고마워.."
"대신 당신 약속 하나 해줘. 서핑을 하겠다고 뭔가를 더 사는 건 이제 안 돼. 당신이 10달러나 써버려서 우리 생활비도 간당간당해졌으니까. 그리고 파도를 타러 갈 때는 나가더라도 내게 미리 말을 해 줘. 또 말없이 나가버리면 나 진짜 화낼 거야."
"물론이지. 약속할게. 나, 주말에만 서핑을 하고 주중에는 진짜 열심히 일하고 집안일도 열심히 도울게."
"퇴근하면 녹초가 돼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집안일을 돕겠다고.. 일이나 열심히 해. 집안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니야. 파도를 타면서 스트레스를 푸니까 힘이 솟구치더라니까. 지금 같아선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으이구.. 오늘 처음 해보구서는 큰소리는..... 그렇게 파도 타는 게 좋아?"
"응. 너무 좋아. 나 오늘 처음 서핑에 도전했는데, 파도 위에 올라타는 것에 성공했어. 대단하지?"
"다들 바로 파도를 타지 않나? 파도 타는 게 그렇게 어려워?"
"얼마나 어려운데. 나도 하루 종일 연습해서 겨우 한 번 해냈다고."
"오오... 우리 남편 대단한 걸.."
기분이 풀린 시오마라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현관 앞이었다. 현관 너머로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라자로의 어머니인 안나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서 오너라. 시오마라도 같이 왔구나. 둘 다 늦게 오는 거 같아 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라자로야.. 네 모습이...... 무슨 일 있었니?"
라자로는 벽에 걸린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물에 흠뻑 젖었다가 말라 눅눅해진 셔츠와 바지는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오직 라자로의 얼굴만이 평온한 환희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오늘 서핑을 시작했거든요. 씻고 오지 못해서 이 모양이네요."
안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 아버지가 파도타기에 미쳐서 가족도 버리고 떠나버렸는데... 라자로야. 너도 서핑에 빠진 게냐?"
그때 시오마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님. 라자로는 절대 가족을 내팽개치지 않을 사람이에요. 제가 믿고 허락해 줬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자로도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저희 가족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제가 잘 아는데 설마 아버지와 같은 잘못을 하겠어요. 서핑은 적당히 스트레스를 풀 정도만 할 거예요."
안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구나... 라자로도 어른인데... 네가 하고 싶은 걸 내가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너무 위험하지 않게 조심히 타거라.. 니 애비가 파도 타러 갈 때마다 내가 을매나 가슴앓이를 했던지.."
"네.. 그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얼른 씻고 오너라. 하루 종일 바다에 있었으니 시장하겠구나."
라자로가 씻고 나오니 식탁 위에는 구수한 향이 나는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갓 구운 보니아또를 먹고 뜨끈한 야채 수프를 마시니 온종일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고되게 움직였던 육체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라자로는 아내가 건네주는 음료를 마시며 물었다.
"셀리아는 아직 친구 집에 있어?"
"응. 카밀라 어머니가 오늘 연락했는데, 내일은 우리 집으로 다시 보내 주겠대."
"카밀라 집에 사례를 해드려야겠어. 딸이 가출할 때마다 그 집에 번번이 신세를 지니...."
"뭐. 카밀라도 가출하면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잖아.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그래.. 자기도 어렸을 때 그랬어? 엄마와 싸우면 가출해서 친구 집에 가서 자고?"
"당연하지. 여자라면 다 그런 경험이 있을걸."
"그렇구나... 아무튼 셀리아가 다시 오면 내가 잘 다독여볼게."
"잘 이야기해 줘. 걔가 아빠 말은 좀 듣잖아."
어머니가 자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후, 잠자리에 들면서 라자로는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처음 파도타기에 성공했고, 아내에게 혼이 좀 나기는 했지만, 아내 덕분에 해변 근처에 보드를 씻고 보관할 장소도 마련할 수 있었다. 다음 주말이 벌써 기다려졌다. 내일이면 다시 페레르의 사무실로 출근해서 온갖 수모를 견디며 쏟아지는 업무들을 처리해야 하는 일상이 시작되지만, 라자로는 예전처럼 거대한 무력감과 불안감에 짓눌리지 않았다.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가고 또 주말이 찾아오면 파도를 타며 모든 시름과 걱정을 날려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니, 어떤 어려움이든 다 감당해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라자로는 뿌듯한 성취감과 행복감에 젖어들며 오랜만에 단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