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에서 서핑을 / Ep 5. wipe out
라자로의 손이 타자기 자판들 위를 경쾌하게 넘나들었다. 손가락이 추는 춤에 호응하여 타자기가 타다닥 타닥 리드미컬하게 노래했다. 하얀 용지 위로 검은 활자들이 순식간에 범람했다. 라자로의 책상 위로 완성된 보고서들이 높이 쌓였다가 보조 사무원의 손을 타고 다른 부서를 향해 흩어졌다. 라자로는 타자기를 서핑 보드로 삼아, 각 부서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문서들의 흐름을 타고 거침없이 일했다. 노련한 서퍼가 적절하지 않은 파도는 흘려보내고, 보드를 힘껏 밀어줄 수 있는 파도를 골라내 듯, 라자로는 문서들을 훑어보며 지엽적인 내용은 빠르게 지나가고, 업무를 힘 있게 진행시켜 줄 중요 내용들을 포착하여 그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파도의 물살을 읽으며 파도의 정점을 향해 나아갈 때처럼, 수많은 문서들의 맥락을 파악한 뒤,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핵심을 향해 모든 지력(知力)을 집중시켰다. 두서없던 업무에 질서가 잡히면서 라자로의 업무 처리에 가속도가 붙었다. 처음 파도 위에 올라섰을 때 체험했던 속도감이 라자로가 일하는 책상 위에서 재현되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자료들이 라자로의 타자기 위에서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어 다른 부서를 향해 빠르게 흘러갔고,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업무들이 라자로의 손에서 물 흐르듯 처리된 후, 다음 업무 담당자들에게 신속히 전달되었다. 라자로가 육지에서 무수히 연습을 했던 동작들이, 파도에 요동치는 보드 위에서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자연스레 펼쳐졌던 것처럼, 법률 사무소에서 라자로가 오랜 시간 동안 반복했던 작업들이, 그가 업무에 온전히 몰두하는 순간, 마치 장인의 손놀림처럼 유려하고도 정밀하게 작동되었다. 흐리멍덩하던 라자로의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았고, 힘없이 흐느적거리던 몸에 활력이 넘쳐흘렀다. 이런 라자로의 변화에 놀란 동료 사무원이 물었다.
"라자로. 요즘 뭔가 변한 것 같네. 아주 기운이 펄펄 넘치는구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라자로는 그저 싱긋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파도타기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이토록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줄은 라자로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서핑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직 직장 동료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았다. 파도타기를 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지만,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지는 못했다. 이제 겨우 낮은 파도 위에서 몸을 일으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라자로는 더 높은 파도 위에서 멋지게 보드를 탈 수 있을 때, 동료들을 해변으로 초청하여 자신의 서핑 실력을 선보이고 싶었다. 그것이 라자로의 소박한 욕심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꼭 높은 파도에 도전해 보자.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으니 분명해볼 만할 거야.'
라자로는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빠르게 내용을 파악해 가던 라자로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문서에 기입된 숫자들에게서 미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라자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숫자들을 확인하며 계산기를 두들겼다. 수치는 정확했다. 그럼에도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라자로는 서류의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바나 해변 72번가 빈민촌 재개발에 따른 보상건이라.... 아니 잠깐.... 그곳은 시므온 할아버지의 집이 있는 곳이잖아. 아바나 시에서 그곳을 재개발하면서 거주민들에게 이주를 위한 보상금을 준다는 내용이군... 시므온 할아버지에게 좋은 일인데... 그런데 왜 이리 찜찜하지?"
라자로의 직감은 계속해서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라자로는 서류철을 뒤져서 최근 72번가 빈민촌 재개발 보상 건에 관련된 문서들을 살펴보았다. 문서의 내용들을 꼼꼼히 확인하던 라자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72번가 빈민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절차에 따라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에 보상금을 모두 수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소송이 은밀히 준비되고 있었다.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하던 라자로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파리시오 호세, 아파리시오 마젤란, 아파리시오 곤잘레스.... 뭐지? 소송을 시작하려는 사람 중에 '아파리시오'라는 성을 가진 이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네... 그런데 '아파리시오'라... 왠지 익숙한 성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라자로는 순간 경악했다.
'아파리시오 페레르! 맞아! 페레르의 성이 '아파리시오'였어! 그렇다면 페레르 집안사람들이 72번가 빈민촌 사람들을 대상으로 뭔가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인데...'
악랄한 페레르가 친인척들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번에 페레르가 획책하고 있는 계락은 의뢰인의 돈을 더 받기 위해 일부러 서류를 누락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빈민촌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막대한 보상금을 노리고 조직적으로 진행하는 거대 사기 행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 범죄를 확실히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다. 라자로는 72번가 보상 건에 대한 서류들을 자신의 책상 은밀한 곳에 보관하며 생각했다.
'좀 더 증거들을 모아보자. 마감일이 다음 주말까지이니.. 그때까지는 반드시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야 해. 잘못하다가는 시므온 할아버지와 마르타 할머니가 보상금도 못 받은 채 집을 빼앗길 수 있어. 그 사태만은 반드시 막아야 해.'
라자로는 해변에 서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이 답답했다. 주말이 되기 전에 페레르의 범죄를 입증할 단서를 찾아내려 애썼지만, 라자로의 수중에 모인 서류들은 심증들만 가득할 뿐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했다. 일개 사무원인 라자로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로는 페레르가 꾸미는 범죄의 뿌리까지 파고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정적인 정보들은 페레르의 집무실 안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었다. 결국 페레르를 직접 만나 그의 진술을 이끌어내거나, 페레르가 집무실을 비운 사이에 단서가 될 서류들을 몰래 훔쳐내야 하는데, 아직 그렇게 할 만한 배짱이 라자로에겐 없었다. 앞으로 일주일이 더 지나면 페레르 집안사람들의 소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초조함이 밀려왔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페레르의 경계심만 자극할 뿐이다. 지금 라자로가 가지고 있는 단서들만으로 의혹을 제기하면, 악랄하고 교활한 페레르는 교묘하게 빠져나갈 구멍들을 마련할 것이었다. 라자로는 고개를 푹 숙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맙소사! 저 사람 좀 봐."
"세상에... 설마 저 파도를 타겠다는 거야?"
경악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니, 저 멀리서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바다를 향해 제트스키 하나가 돌진하고 있었다. 그 제트스키에 묶인 줄을 붙잡고 한 사내가 한 조각 보드에 몸을 의탁하여 장차 일어날 파도를 향해 나아갔다. 산맥처럼 광대하게 융기하던 바다는 노성을 터뜨리며 크게 입을 벌렸다. 파도의 규모는 멀리 해변에서 보는 이들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압도적이었다. 드높게 치솟은 푸른 장벽이 거대한 물보라를 하얗게 일으키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제트스키는 파도의 장벽 위로 사내를 올려준 뒤 황급히 파도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파도가 어찌나 거대하던지 파도 위에 올라탄 사내가 검은 씨앗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사내의 보드가 파도 위를 거침없이 활강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는 금방이라도 사내의 몸을 휘감아 파묻어버리려는 듯 맹렬하게 몰아닥쳤다. 파도가 산사태처럼 무너지며 일으키는 하얀 물보라가 바로 뒤에서 휘몰아치는데도 사내는 평지를 가는 듯 평온하게 보드를 타고 있었다. 사내의 보드는 태산이 부서지듯 무너져내리는 파도의 몸 위에 한 줄기 생채기를 길게 새기며 경쾌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사내의 경이로운 서핑 실력을 목도한 사람들이 탄성과 환호성을 질렀다. 라자로의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벅차게 차올랐다.
'나도 저렇게 파도를 타보고 싶다. 저 사내처럼...'
라자로는 보드를 거머쥐고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페레르에 관한 일은 지금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에 대한 생각은 월요일에 하자. 파도에만 집중해서..... 오늘은 꼭 높은 파도를 타 보는 거야.'
라자로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보드 위에 몸을 실은 라자로는 나지막한 파도가 밀려오는 지점을 지나 평소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먼바다에 진입하면서 보드를 밀어붙이는 물살의 힘이 거세졌다. 바다는 한껏 몸을 도사리며 수면 위의 모든 대상을 휘감아 저 깊은 심연으로 내동댕이칠 기세로 무섭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매캐한 공포감이 북받쳐 올랐다. 호흡이 가빠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몸이 뻣뻣해졌다.
'이거 잘못하면 죽겠는걸...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지만 돌아가기에는 늦었다. 광막하게 부풀어 오른 수면 위로 균열이 나고 있었다. 파도가 거대한 몸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라자로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가는 거야.'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보드 위에 올라서는 타이밍을 놓치면 광포한 파도에 휘말려 거세게 휘몰아치는 물살 속으로 끝없이 곤두박질 칠 것이다. 라자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집중했다.
'그동안 수없이 반복했던 동작이야. 할 수 있어.'
순간, 바다가 보드를 강하게 밀어 올렸다. 업(UP)! 환청처럼 마누엘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라자로는 퉁기듯 몸을 일으키며 두 발을 보드 위로 올렸다. 보드가 격하게 요동쳤다. 광대한 녹색 절벽으로 일어선 바다는 보드를 탄 라자로를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라자로는 균형을 잡으려 애를 썼지만 파도의 힘은 예상보다 거셌다. 보드가 미친 황소처럼 온몸을 뒤틀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속도감이었다. 라자로의 시야가 급속도로 좁아졌다. 높이 치솟은 파도의 벽이 모든 소리를 흡수하면서 사위가 고요해졌다가, 정점에 치달은 파도가 일시에 허물어지며 내뿜는 굉음이 귀가 먹먹하도록 천지를 울렸다. 라자로의 등 뒤에서 눈사태처럼 하얗게 터져 나오는 물보라가 금방이라도 라자로의 몸을 집어삼키려는 듯 흉포하게 달려들었다. 공포에 질린 라자로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산처럼 하늘 높이 치솟은 파도의 벽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라자로의 몸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순간, 라자로는 균형을 잃어버렸다. 거대한 파도에 휘말린 라자로는 온몸을 으스러뜨리려는 듯 몰아치는 격류 속에서 격렬하게 휘둘리다가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렇게 죽는 건가?’
라자로는 죽음이 임박함을 느꼈다. 깊은 수심에서도 바다는 격동했고, 몸을 휘어잡고 거칠게 휘두르는 물살은 좀처럼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이 차는데 수면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사면이 검푸른 바닷물이어서 어느 쪽이 위이고 아래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의식이 흐릿해졌다. 환각이 보였다. 시오마라가 어린 셀리아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걷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셀리아가 다섯 살 무렵이었던가. 셀리아를 보며 맑게 웃는 시오마라의 얼굴에 햇살이 빛난다. 그들에게 라자로도 다가가려 하지만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지다 사라진다. 페레르의 얼굴이 떠오른다. 뒤룩뒤룩 살이 찌고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라자로를 집어삼키겠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린다. 눈을 질끈 감아도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사라지지 않는다. 라자로는 페레르의 환영에서 벗어나려 허우적허우적 몸부림을 쳤다. 비대해진 페레르의 얼굴은 동굴처럼 거대한 입을 벌려 라자로를 삼켰다. 짙은 어둠이 펼쳐졌다. 칠흑 같은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짙푸른 파도가 높게 일어났다.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서 아버지가 보드를 타고 질주했다.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명랑하게 울려 퍼졌다. 라자로는 외쳤다.
- 아버지 살려주세요!
아버지가 말했다.
- 이 겁쟁이 녀석아. 뭐가 그리 두렵니?
- 파도가 무서워요.
- 무섭다고 피하려 드니까 파도에 잡아먹히지.
아버지는 라자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라자로야. 바다 위에선 널 도울 사람이 없어. 어떤 파도를 만나든 너 스스로 해결해야 해. 죽일 듯이 밀어닥치는 파도 위로 올라타고 싶다면 절대 도망치지 마. 목숨까지 걸고 덤벼들라고.
라자로는 이를 악물었다. 발목에 묶인 리쉬 코드(Leash Cord : 서퍼의 발목과 보드를 연결하는 생명줄)를 붙잡았다. 다행히 코드는 격한 파도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라자로는 잘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리쉬 코드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면으로 다가갈수록 주위가 환해졌다. 마침내 라자로는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보드를 붙잡을 수 있었다.
"커헉. 컥...."
안간힘을 다해 보드 위로 올라 엎드린 라자로는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흐릿한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먹먹해진 귀에서 맹렬하게 이명이 울렸다. 그렇게 라자로가 한참을 보드 위에서 맥없이 늘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세요! 괜찮아요?!"
라자로가 힘없이 고개를 돌려보니 청년 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아.. 아까 높은 파도를 거침없이 타던 청년이구나...'
청년은 라자로의 서핑 보드를 붙들더니 말했다.
"조금만 힘내세요. 아버지의 제트스키로 해변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청년은 헤엄치면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트스키 옆으로 라자로의 서핑보드를 밀어주었다. 청년은 제트스키에 앉아 있던 사내와 함께 라자로를 부축하여 제트스키 뒤에 태웠다. 사내는 라자로가 자신의 뒷좌석에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고 라자로의 리쉬 코드를 발목에서 벗겨내어 청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파비앙. 우리는 먼저 출발하겠다. 너는 이 사람의 보드를 챙겨서 오너라."
낯익은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라자로는 시선을 옮겼다.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묵묵히 제트스키의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산티아고. 그 무례하고 불손했던 서핑 가게 주인장. 그 자가 나를 구하러 왔다니....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이토록 드넓은 바다에서 내가 파도에 휩쓸린 것을 어떻게 안 거지?... 산티아고는 라자로가 자신을 잘 붙들고 있는지를 확인한 후 제트스키를 출발했다. 파비앙은 라자로의 보드 위로 올라가 리쉬코드를 자신의 발목에 매고 잠시 기다리다가 알맞은 파도가 일어서자 능숙하게 파도 위로 올라섰다. 푸른 파도를 탄 파비앙의 몸이 산티아고와 라자로가 도착한 해변을 향해 경쾌하게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