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Habana (6)

쿠바 아바나에서 서핑을 / Ep 6. Riding

by 통나무집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해변에 도착한 라자로는 산티아고에게 고개를 숙였다. 산티아고는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돌려 파비앙을 바라보았다. 파비앙은 보드를 타고 거친 파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라자로는 감탄하며 말했다.

"아드님 솜씨가 정말 대단하네요."

"대단하긴... 아직 한참 멀었소."

파비앙은 해변에 도착하자 보드를 들고 라자로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이제 괜찮으신가요?"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았구나."

"아니에요. 바다 위에서는 서로 도와야지요."

"고맙구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으마.. 그런데 내가 파도에 휩쓸린 것을 어떻게 알았니? 이 넓은 바다에서 나를 보기 어려웠을 텐데..."

"아버지 덕분이죠. 아버지는 아저씨가 파도를 타는 모습을 매번 지켜보셨거든요."

"아버지가?"

라자로는 의아했다. 보드를 구매할 때 그토록 무례하던 사내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니.. 그런 라자로를 바라보며 파비앙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아저씨 칭찬을 많이 하셨어요. 근성이 좋다고, 쉽게 포기할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요. 오늘은 제 서핑 훈련을 도우시다가 아저씨를 발견하신 모양이에요. 오늘은 파도가 크게 일어나는 날인데, 아저씨가 너무 먼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제트스키를 타고 아저씨 근처에 머물러 있다가 아저씨가 파도에 휩쓸리는 광경을 보고 구하러 간 거예요."

라자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랬구나... 산티아고 씨. 정말 고맙소."

산티아고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쓸데없는 말을 하는구나. 파비앙."

라자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홀로 외롭게 파도를 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감사한 마음이 벅차오르고 기운이 솟았다. 그렇게 파비앙와 산티아고 부자를 바라보는데 파비앙이 거대한 파도 위를 거침없이 활강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라자로는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큰 파도 위에서도 두려움 없이 보드를 탈 수 있을까.

"파비앙. 묻고 싶은 게 있구나."

"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아까 네 아버지가 너를 거대한 파도로 데려가시는 것을 보았어. 해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질겁할 정도로 큰 파도였는데 너는 아무 두려움 없이 파도를 타더라고. 어떻게 하면 너처럼 담대하게 파도를 탈 수 있니?"

파비앙이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제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셨군요... 저도 처음에 큰 파도를 타러 갈 때 많이 무서워했어요. 주저하다가 포기할 때도 많았고요. 그때마다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씀이었니?"

"아버지께서 항상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제가 파도에 휩쓸리면 바로 구해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네가 겁 없이 파도에 덤벼들 수 있었구나."

"아니에요. 아버지가 근처에 계셔도, 저는 막상 큰 파도를 마주하면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너무 두렵더라고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지금은 그토록 거대한 파도도 거침없이 탈 수 있게 되었어?"

파비앙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저를 파도로 계속 데려가셨어요. 파도를 타기 전에 파도에 휩쓸리는 법부터 배우자고 하시면서요. 우선은 파도를 타려 하지 말고 그냥 파도에 휩쓸려 보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 말씀대로 파도에 몇 번 휘말려보니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고 바닷물을 좀 먹었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 이후로는 좀 더 과감하게 파도를 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구나..."

라자로는 고개를 끄덕이다 생각에 잠겼다.

'방금 나도 파도에 휘말렸지... 분명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정말 죽을 위기였나... 아니야... 휘몰아치는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그만이었는데.... 그토록 겁에 질릴 일도 아니었는데... 난 왜 그런 공포를 느꼈을까....'

라자로는 땅에 놓인 보드를 집어 들고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파비앙이 당황하며 라자로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아저씨. 또 파도를 타러 가시게요? 아직 몸이 다 회복된 것 같지 않으신데.. 오늘은 그만 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라자로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아직 파도가 무섭구나. 그래서 네 아버지 말씀대로 나도 파도에 휩쓸리는 법부터 배워보려 해. 그냥 이대로 돌아가면 파도에 대한 공포감만 더 느끼게 될 거야."

"하지만..."

그때 라자로와 파비앙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산티아고가 입을 열었다.

"보내드리거라. 파비앙. 생각보다 나약한 사내는 아닌 것 같으니."

산티아고는 따스한 눈빛으로 라자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 근처에 있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구하러 가겠소. 그러니 마음껏 파도를 느껴보시오. 파도 속에서 몇 번 뒹굴면서 파도에 대한 공포가 좀 누그러지면, 당신도 쓸데없이 파도와 겨루지 않고 파도와 노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될 거요."

라자로는 가슴속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고맙소. 이 공포만큼은 오늘 반드시 극복해 내겠소."




라자로는 보드 위에 몸을 싣고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파도가 밀려왔다. 라자로는 파도에 몸을 온전히 맡겨보았다. 파도가 몸을 휘감아 들어 올렸다가 물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호흡이 막히고 시야를 온통 짙푸른 물이 메우면서 공포감이 물씬 밀려왔다. 라자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처음 파도를 타다가 물속에 빠졌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치 어머니의 양수에 들어온 듯 평온하고 아늑했었던 순간... 그 감각을 떠올리니 불안한 마음이 가시면서 온몸에 잔뜩 서렸던 공포감이 서서히 풀렸다. 파도가 지나갔는지 물의 흐름도 유순해졌다. 라자로는 리쉬코드를 잡고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보드 위에 올라서자 막혔던 호흡이 풀리면서 탁 트인 푸른 하늘과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 라자로는 서너 번 파도에 휩쓸렸다. 파비앙의 말대로 물만 몇 번 먹었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편에서 제트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산티아고가 보였다. 산티아고는 파비앙의 훈련을 지도하면서 여차하면 라자로를 도우러 달려올 수 있는 위치에 든든히 자리 잡고 있었다. 라자로의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졌다. 라자로는 보드 위에 엎드린 채 온몸의 감각에 집중했다. 보드 아래로 물살이 출렁이고 따스한 햇살이 피부를 어루만졌다.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 울음소리 사이로 저 멀리서 또 파도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라자로는 파도가 밀려오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파도를 탈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분주히 이동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파도이다 싶으면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지금 라자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보드 위에 엎드려서 온몸의 감각을 생생히 열어 파도가 전해오는 기운을 오롯이 느끼기만 했다. 파도가 다가오자 보드 밑의 바닷물이 요동치며 와글와글 들끓기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가 찾아오면 청껏 소리치며 달음박질하는 아이처럼, 파도는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달려왔다. 라자로는 근접해 오는 파도를 보며 이전처럼 파도를 잘 탈 수 있는 방향을 예측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흘러가는 방향을 향해 보드를 움직였다. 간, 보드를 띄운 수면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단전에서 짜릿한 쾌감이 피어올라 온몸으로 번졌다. 보드 위에 올라설 타이밍을 놓치면 거친 파도에 휘말리는 긴박한 순간에도 라자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파도와 몸이 보내오는 신호들을 헤아렸다. 수면의 상승이 정점에 다다르는 순간, 마치 평지에 올라선 것처럼 보드가 안정적으로 머무는 감이 느껴졌다. 라자로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몸을 일으켜 두 발을 보드 위에 올렸다. 기이했다. 마치 평지 위를 뚜벅뚜벅 걸어가듯 모든 움직임이 평온했다. 시간마저 서서히 흘러가는 듯, 드높이 치솟은 파도의 몸 위로 보드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찰나의 순간들이 선연하게 감지되었다. 선명한 에메랄드 빛 파도 위에서 라자로의 내면은 환하게 열렸다. 하늘도 바다도 바람도 파도도... 모두가 라자로의 심연에서 터져 나온 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바로 뒤에서 거대한 몸을 연신 엎드려며 하얗게 축포를 터트리는 파도를 배경으로 라자로는 왕처럼 진군했다. 라자로의 몸은 파도의 격동에 맞추어 부드럽게 작동했고, 그 몸의 통제를 받아 움직이는 보드는 잘 훈련된 군마처럼 거세게 저항하는 물살을 딛고 거침없이 질주했다. 라자로의 몸놀림은 지난한 전쟁을 끝내고 신민들의 환호성 속에서 개선하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했다. 해변 근처에서 도가 기진하여 더 이상 보드를 밀어주지 못하자 라자로는 물 위로 가볍게 뛰어내리며 라이딩의 마침표를 찍었다.




라자로는 한 동안 멍히니 물속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런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방금 전 파도를 탔던 순간이 꿈결처럼 아득했다.

'내가 잠시 환상에 빠졌던 걸까? 진짜 내가 파도를 탔었나?'

그때 제트스키 소리가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산티아고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훌륭하오. 정말 멋진 라이딩이었소."

라자로는 웃었다. 더없이 홀가분하고 편안하게.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라자로의 웃음이 울려 퍼지는 바다 위로 쿠바의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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