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에서 서핑을 / Ep 7. Take - Off
하늘에 선홍빛 석양이 번졌다. 해변을 향해 밀려오는 파도도 붉게 물들었다.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라자로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멋진 하루였어.'
큰 파도를 타보고 싶어 겁 없이 먼바다로 나아갔다가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깊은 물속에 잠겼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물 위로 올라와서 산티아고와 파비앙 부자의 도움을 받았다. 파도에 대한 공포에 잠시 사로잡혔지만 파비앙과 산티아고의 조언에 힘입어 다시 바다로 나아가 파도에 휘말리는 법부터 연습했다. 여러 번 파도에 휩쓸리다 난생처음으로 환상적인 라이딩을 경험했다. 그 이후 해가 저물 때까지 라자로는 파도와 더불어 신나게 놀았다. 꿈만 같은 시간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발걸음이 못내 떨어지지 않았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라자로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노랫소리가 귓가에 흘러왔다. 누군가가 버스킹을 하는 모양이었다. 라자로는 홀린 듯 그곳으로 향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거나 흥에 겨워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들썩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남루한 옷차림의 청년 셋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카혼 대신에 두들기는 나무 상자가 둥 두둥 둥 흥겨운 박자를 조성하고, 빈 콜라 캔에 굵은 모래를 넣어 만든 마라카스가 치키 치키 울며 리듬감을 더했다. 칠이 벗겨지고 넥(Neck) 부분에 테이프가 감겨 있는 낡은 기타에서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는 유명한 볼레로인 <Quizas Quizas Quizas>. 흥겨우면서도 애달픈 곡조는 황혼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해변 위에서 시원하게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를 벗 삼아 청중들의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 한 여성이 청중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라자로는 흠칫했다.
'셀리아..?'
라자로의 딸 셀리아는 그윽한 눈빛으로 청중들을 바라보았다. 환호성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Que te importe que te ame Si tu no me quieres ya?
너는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데 널 사랑 했다는게 무슨 의미겠어?
El amor que ya ha pasado No se debe recordar
지나간 사랑은 기억하지 않는게 좋아
Fui la ilusion de tu vida Un dia lejano ya
지나간 날엔 난 네 인생의 환상이었지만
Hoy represento el pasado No me puedo conformar
그 과거가 다시 온다해도 나는 싫어..
깊고도 청아한 음색이었다. 셀리아가 부르는 노래 <Veinte Años>는 아스라이 일어난 안개처럼 서서히 밀려와 사위를 아득하게 감싸며 가난과 고독과 아픔과 설움 속에서도 아리게 빛나는 청춘의 감정들을 아련하게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불러주는 노래를 타고 모두가 짙은 우수에 젖어 저마다 애절하게 사랑했던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라자로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시오마라를 처음 만났던 날, 붉은 치마를 휘날리며 열정적으로 살사 댄스를 추는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고, 마음을 표현할 용기가 나지 않아 평소 잘 마시지도 않던 술을 연신 들이켰고, 거나한 취기에 기대어 그녀에게 고백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오고 시야가 흐느적흐느적 흔들릴 때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 그 애틋하고 황홀했던 순간들이 셀리아의 목소리를 타고 넘실넘실 밀려왔다. 셀리아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담백하게 노래를 불렀지만, 그녀의 노래는 듣는 이로 하여금 현실을 잊고 꿈을 꾸는 듯 각자 열망하고 꿈꾸던 시간들 속으로 깊이 자맥질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야.. 정말 잘 부르는 걸."
"그러게... 이 정도 실력은 아바나에서도 흔치 않을 텐데.. 여기서 썩히기 아까운 실력이야.."
주위 사람들이 연신 감탄하는 소리를 들으며 라자로는 깨달았다. 딸에게 노래는 그저 한 순간에만 심취하는 유흥이 아니었다. 음악은 딸의 영혼에 깊이 뿌리내린 갈망이자 삶을 든든히 지탱하는 기반이었다. 라자로는 결심했다.
'셀리아는 음악을 해야만 하는 아이였구나.. 이제는 딸이 하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어.'
사무실에 출근한 라자로는 72번가 재개발 보상 건에 관한 서류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라자로가 수집한 문서들은 페레르가 수많은 빈민들을 상대로 저지르는 대규모 사기 및 횡령의 윤곽은 드러냈지만 그의 범죄를 확실히 입증할 증거는 되지 못했다. 라자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주면 소송이 시작되는데... 내 힘으론 페레르를 막기에 역부족인 건가...'
이대로 일이 진행되면 페레르 일가는 합법적으로 72번가를 소유하게 된다. 소유권을 가르는 재판정에서 72번가 빈민촌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시므온 할아버지가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지르고 안나 할머니가 울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교활한 페레르는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유리한 서류들을 잇달아 제시하겠지.. 앞날을 예상할수록 답답하고 초조했다.
'이런 감정들에 휩쓸리지 말자. 조급하게 움직였다가는 기회를 잃게 돼.'
라자로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파도를 기다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적합한 파도를 고르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열어서 물결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감지하던 순간을. 그 순간의 감각을 떠올리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라자로는 차분히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라자로의 시선 아래로 수많은 활자와 숫자들을 흘러갔다. 수없이 반복해서 살펴보아도 여전히 문서들은 범죄의 징후만 드러낼 뿐 뚜렷한 단서를 내어놓지 못했지만, 라자로는 다시 활자와 숫자들 속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페레르 일가의 소송 서류들을 검토하던 라자로의 눈에 탁 걸리는 이름이 있었다.
'아파리시오 페레르 곤잘레스.. 뭐지? 이 사람도 페레르 일가인데.. 왜 공소장 명단에 들어있지?'
얼핏 보기엔 대수롭지 않은 사항이었다. 단순히 참고인으로 첨부된 것일 수도 있었다. 곤잘레스에 관한 다른 서류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법리상으로는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라자로의 직감은 계속해서 곤잘레스를 물고 늘어졌다. 라자로가 가진 서류들로는 해소할 수 없는 의혹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페레르를 직접 만나 곤잘레스에 관한 서류들을 더 받아내야 한다. 숨이 턱 막혔다. 페레르의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수없이 페레르의 계략에 휘둘렸다. 단 한 번도 그의 술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페레르를 상대할 수 있을까... 페레르에 대한 두려움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파도처럼 일어섰다.
라자로는 산티아고의 말을 떠올렸다. 파도를 타기 전에 파도에 휩쓸리는 법을 배워라. 여러 번 파도에 휩쓸리며 별일 없음을 깨달았던 순간. 이리저리 생각하고 계산하길 멈추고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파도를 마주했던 그 감각들. 결국 파도 위에 올라섰던 순간들.. 그 순간을 떠올리며 라자로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 더는 피하지 말자. 가자. 페레르에게로.'
라자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페레르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페레르는 막바지 소송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라자로는 목을 가다듬었다.
"저기.. 변호사님."
"뭐야! 바빠 죽겠는데 왜 이리 귀찮게 굴어!"
라자로는 페레르의 짜증과 분노를 자극할 말을 골라 던졌다.
"죄송합니다. 내일 법원으로 보낼 서류들을 정리하는데 제가 빠트린 게 있어서요."
페레르의 얼굴 근육이 꿈틀 했다.
"네놈이 항상 그렇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체 뭘 빠트렸는데?"
"네. 이 공소장 명단에 있는 사람들 중 호세부터 곤잘레스까지 공증서를 첨부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페레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재판이 코 앞인데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내가 이런 서류까지 하나하나 챙겨 줘야 해?!"
페레르의 분노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분노를 이용하여 페레르의 경계심을 무너트려야 한다. 라자로는 한껏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저기... 이 사람들의 공증서를... 빨리.. 발급받으려면..."
라자로의 어눌한 말투에 페레르의 분노가 폭발했다.
"야! 이 새끼야! 할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해!"
"그러니까.. 변호사님께서... 가지고 계신 서류를 주시면..."
"에이 시xx!!"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페레르는 라자로의 얼굴을 향해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집어던졌다.
"이 개xx야! 오늘 내로 이 서류들 모두 정리하고 공증서도 모두 발급해 놔! 내일까지 처리해내지 못하면 이 바닥에 다시는 발 붙이지 못할 줄 알아!!"
페레르는 한참을 라자로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다가 씩씩거리며 일어서더니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다. 라자로는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한 장 한 장 집어 들면서 미소 지었다. 라자로가 찾고 싶었던 정보들이 문서마다 가득했다. 개별 문서로는 증거가 되지 못하지만 라자로가 모아둔 문서와 연결하면 페레르의 범죄를 입증할 강력한 증거가 될 자료들이 곳곳에 있었다.
'아까는 그토록 두렵더니... 막상 해보니까 아무 일도 아니었네... 페레르도 이제 끝장이군.'
라자로는 서류 몇 장을 접어 안 주머니에 숨긴 후 페레르의 책상 위로 문서들을 정갈하게 정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자기 자리로 돌아와 그동안 모았던 서류들을 챙긴 그는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검찰청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