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에서 서핑을 / Ep3. 파도타기
"보드를 사시겠다구요?"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탐탁지 않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자로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 그렇소..."
사내는 라자로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 몸으론 파도를 타기 힘들 텐데요."
라자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팔과 다리는 비쩍 말랐는데 배는 불룩 튀어나와 있다. 누가 봐도 파도 위에서 요동치는 보드 위에 중심을 잡고 일어설 만한 몸은 아니었다. 라자로는 사내의 눈을 피하며 겨우 말했다.
"처음부터 잘 타는 사람은 없잖소. 조금씩 연습해 볼 생각이오. "
사내는 묵묵히 라자로를 바라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야 보드를 팔면 좋지만... 이거 오늘 송장 하나 치우는 게 아닌가 하여 꺼림칙하네.... 이보쇼. 파도를 타는 일은 생각보다 위험하오. 그래도 할 거요?"
순간, 라자로의 마음에 오기가 치밀었다.
'젠장. 장사꾼이 보드나 팔면 되는 거지 쓸데없는 걱정은... 이래 봬도 나는 서핑에 미쳐 가족도 버린 남자의 아들이라고... 바다로 나가면 내 피에 숨겨진 서퍼의 본능이 깨어날지 누가 알어..'
라자로는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팔 거요? 말 거요? 안 판다면 다른 가게로 가겠소."
사내의 눈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큭큭. 당신도 별 수 없는 쿠바 사내로구먼.. 좋소. 내 당신에게 맞는 보드를 내어 주겠소."
사내는 가게 뒷 편의 창고로 들어가더니 노란색 보드를 하나 들고 나왔다. 가게에 진열된, 세련된 보드들과 달리 크고 뭉툭하며 둔중해 보이기까지 한 보드였다. 라자로는 그 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왕 큰맘 먹고사는 것인데 좀 더 멋지고 날렵한 보드를 사고 싶었다. 라자로는 상어의 몸처럼 맵시가 날렵하고 검은 광택으로 빛나는 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게 더 마음에 드는데... 이건 얼마요?"
사내가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초보자가 그 보드를 타면 바로 천국으로 갈 게 뻔하오. 그나마 내가 가져온 보드가 안전할게요."
사내의 형형한 눈빛에 눌려 라자로는 더 흥정하기 어려웠다.
"좋소. 이 노란 보드는 얼마요?"
"10달러요."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10달러면 월급의 절반이나 되는 거금이다.
"아니.. 이렇게 보잘것없는 보드가... 10달러나 한단 말이오?"
"이게 가장 싼 거요. 저기 진열된 보드들은 모두 20달러 이상하오."
라자로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라자로가 생각한 상한선은 8달러였다. 그나마 10달러가 라자로가 지불할 수 있는 최선의 금액이었다.
"그렇구려... 이 보드로 하겠소."
라자로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힌 초록색 지폐 10장을 꺼냈다. 피 같은 돈이었다. 페레르의 패악질을 견디고 의뢰인이 퍼붓는 온갖 수모를 감수하며, 숨 막히게 더운 사무실에 틀어박혀 하루 온종일 일해 벌어들인 돈. 이 돈이면 온 가족이 한 달은 넉넉하게 먹을 식량과 함께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치마를, 딸이 열광하는 가수의 팝송 테이프를 살 수 있다. 사내에게 지폐를 건네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번 사용하면 반품할 수 없으니 잘 생각하시오. 보아하니 한 두 번 타다가 포기할 것 같은데."
사내의 조롱이 섞인 말을 듣고 다시 오기가 치밀은 라자로는, 지폐를 사내가 서 있는 카운터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살 거요! 두고 보시오. 오늘 내로 보란 듯이 파도를 타고 말 테니!"
"우하하하! 좋소! 패기가 대단하시구먼. 여기서는 바다가 잘 보이니, 내 똑똑히 보고 있겠소. 큭큭. 아무튼 파도 몇 번 타보다가 안 되겠다고 여기로 쪼르르 돌아와서 도로 물러달라고 조르지 마시오. 큭큭큭."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라자로는 사내가 세워 둔 노란색 보드를 집어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보드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낑낑거리며 보드를 들고 가는 라자로의 등을 향해 사내가 외쳤다.
"들고 가다가 부수겄네! 중간 부분을 꽉 잡고, 보드가 땅에 끌리지 않게 조심히 들고 가쇼! 보드 부쉈다고 가게로 돌아와 우는 소리하지 말고!"
화가 치민 라자로는 보드를 번쩍 들고 해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냘픈 팔로 거대한 보드를 꽉 움켜쥐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연신 움직이며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배불뚝이 사내... 라자로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에게 꽂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남자 좀 봐... 저 꼴에 파도를 타겠다고.... 야.. 정말 웃기다... 몇 번 바닷물 먹다 보면 금방 포기하겠지... 사방에서 비웃고 조롱하는 소리가 흘러와 귓전에서 웅얼웅얼 울렸다. 라자로는 이를 악물고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바다에 도착한 라자로는 옆에 보드를 내려놓은 뒤 잠시 머뭇거렸다. 막상 바다로 뛰어 들려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저 멀리서 거칠게 일어서는 파도들을 바라보니 스멀스멀 공포감이 피어났다. 보드를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보드를 사기 위해 지불했던 거금을 떠올리니 차마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사내에게 큰소리치던 순간을 떠올리며 라자로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막상 해보면 별 거 아닐 거야. 보드를 타고 나아가다 파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보드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되잖아.. 가자. 가 보자.'
하지만 발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주저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처음 본 아저씨네. 파도 타러 온 거예요?"
고개를 돌리니 웬 사내아이 하나가 해맑게 웃으며 라자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는 열두 살 즈음되었을까. 앞니가 하나 빠진 얼굴이 무척 천진난만해 보였다. 아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라자로는 괜히 의연한 척하며 말했다.
"그래. 오늘 쉬는 날이라 오랜만에 보드를 타러 왔어."
"그렇군요. 헤헤. 오늘은 파도가 좋아요. 재미있을 거예요."
"그렇구나. 너는 언제 왔니?"
"저는 아침 일찍 와서 쭉 파도를 탔어요. 잠깐 점심 먹으러 집에 갔다가 또 타러 온 거예요."
"하하... 너는 파도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아이가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쿠바 사람이니까요. 헤헷. 저 먼저 갈게요. 즐겁게 타세요."
아이는 보드를 던지며 바다 위로 뛰어들었다. 능숙하게 보드 위에 올라탄 아이는 활기차게 팔을 휘저으며 파도가 일어나는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니 라자로도 용기가 솟았다.
'저렇게 어린아이도 하는 일을 나라고 못할까. 가자.'
라자로는 보드를 바닷물 위로 밀어낸 후 보드를 붙잡고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보드 위에 올라타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들고 갈 때는 보드가 무척 크게 느껴졌는데 막상 그 위로 온몸을 올리려니 의외로 비좁았고, 육지에서 만질 때는 거칠거칠했던 보드의 겉면이 바닷물에 흠뻑 젖으니 생각보다 훨씬 미끄러웠다. 라자로가 보드 위로 올라타려 하면 보드는 휘리릭 돌거나 벌컥 뒤집어지면서 라자로의 몸을 바다로 내팽개쳤다. 라자로는 허우적거리며 바닷물을 실컷 들이마셨다가 겨우 보드를 붙들고 정신을 차렸다.
'보기엔 쉬워 보였는데... 다들 우찌 그리 쉽게 보드 위로 올라가는 거지?'
라자로는 주위에서 서핑을 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보드를 잡고 물에 띄우는 순간, 주저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솟구쳐서 보드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렇구나.. 괜히 망설이면서 조심스레 타면 더 미끄러지는구나.. 좀 더 과감해져야겠어.'
라자로는 다시 해변으로 돌아갔다. 보드를 힘껏 부여잡고 깊이 심호흡을 한 뒤 바다를 향해 달렸다. 바닷물 위로 보드가 뜨는 순간, 의심이나 두려움은 떨쳐버리고 보드 위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온몸이 보드 안에 들어서는 순간, 보드가 든든하게 몸을 받쳐주는 게 느껴졌다. 라자로는 보드에 온몸을 맡긴 채 잠시 눈을 감고 가볍게 출렁이는 물결과 등 위로 부드럽게 쏟아지는 햇살을 느꼈다. 더없이 아늑하고 평온했다. 양팔로 바닷물을 가볍게 저어보았다. 차가운 바닷물이 햇볕에 데워진 피부를 어루만지자 짜릿하게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물 위에 떠 있기만 해도 좋구나.. 파도까지 타게 되면 얼마나 신날까...'
눈을 뜨고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파도와 더불어 신명 나게 노는 사람들... 라자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설렘과 기대감이 벅차게 차올랐다. 골치 아픈 서류를 노려보며 오랫동안 딱딱하게 굳어버렸던 몸이 햇살과 바닷물 속에서 흐물흐물 풀리면서, 온몸의 감각이 생생하게 깨어났다. 라자로는 조심스레 팔을 휘저으며 파도를 향해 나아갔다. 보드는 밀려오는 물살을 거스르며 부드럽게 전진했다. 라자로는 보드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았다. 왼팔을 더 저으며 몸을 왼편으로 살짝 기울이니 보드가 왼쪽으로 향했고, 오른편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해 보니 보드가 오른쪽을 향했다. 자신의 몸이 이끄는 대로 보드가 움직이는 느낌이 라자로는 생경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끌려다녔던 몸이었다. 페레르의 호통을 들으며 사무실을 정신없이 오갔다. 의뢰인들의 요구에 따라 땡볕 속에서 아바나 곳곳을 황급하게 돌아다녔다. 가족의 필요를 채우려 직장과 집을 숨 가쁘게 오가던 순간들... 모멸감과 피로감에 잔뜩 찌들어 있었고 항상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몸.... 그 몸은 분명 라자로의 육신이었지만 그의 욕구나 소망에 관계없이 항상 다른 사람들이 퍼붓는 말들에 완강히 묶여서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랬던 육신이, 여기 보드 위에서는 라자로의 의지에 온전히 순종하여 그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마음껏 움직이고 있었다. 라자로는 온몸을 강하게 옭아맸던 쇠사슬을 훌훌 벗어던지고 감옥문을 나서서 처음으로 자유로운 대지에 발을 내디디는 죄수처럼, 육신을 감싸는 홀가분한 기운을 조심스럽게 감지해 보았다.
"아저씨. 파도 많이 타셨어요?"
아까 보았던 아이였다. 아이는 보드에 몸을 싣고 라사로 옆으로 다가와 해맑게 웃었다. 왠지 이 아이에게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라자로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아니.. 사실 말이다.. 나는 오늘 처음 보드를 타보는 거야."
"우와! 처음인데 벌써 바다에서 보드 위로 올라타신 거예요? 진짜 대단하다!"
"응? 다들 그렇게 하지 않니?"
"아니에요. 저는 삼일이나 걸렸거든요. 아저씨 천재 아니에요? 헤헷"
아이가 칭찬해 주자 라자로는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자신감이 치솟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 저기 파도 타러 가요."
아이가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니 나지막하게 바다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곧 파도가 일어날 듯했다. 부푸는 규모를 보니 무섭게 큰 파도는 아닐 것 같아 라자로도 왠지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가자꾸나."
아이는 신나게 팔을 휘저으며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서핑을 할 때 주위 사람과 가까우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던 라자로는 아이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다. 아이가 보드 위에서 취하는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고 흉내 내며 라자로는 곧 파도가 일어날 바다로 진입했다. 순간, 파도가 초록색 벽을 세우며 와락 일어났다. 생각보다 제법 큰 파도였다. 아이는 퉁기듯 몸을 일으키며 보드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일어서더니, 파도를 타고 거침없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파도의 물결을 타고 능숙하게 질주하는 아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자로는 곧이어 자신에게 몰려오는 파도를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높게 일어났던 파도는 많이 무너져서, 완강한 벽이 아니라 이제 하얗게 부글거리는 거품 덩어리로 변해 있었지만, 라자로의 육신 따위는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릴 것만 같은 규모를 유지하며 무섭게 달려들고 있었다. 겁에 질린 라자로는 보드를 힘껏 부여잡고 밀어닥치는 파도를 맞이했다. 파도를 정면으로 받아낸 보드는 라자로의 몸과 함께 허공으로 치솟다가 뒤집혔고, 다시 바다로 곤두박질친 라자로는 물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다. 수심이 깊어지면서, 눈과 귀가 물에 틀어막히어 온 세상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라자로는 물에 빠져 죽는다는 공포보다, 마치 태아가 되어 엄마의 양수 속에 머무는 듯한 평온함을 느꼈다. 그 어떤 소음도 범하지 못하는 곳. 어떠한 의무나 책무도 없이, 아무런 무게감도 느끼지 않는, 온전한 무중력 상태... 라자로는 언제까지고 여기에 머물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곧 숨이 차올랐다. 라자로는 발목에 묶인 리쉬 코드(Leash Cord : 보드와 서퍼의 발목을 연결한 생명줄)를 붙잡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푸.. 하아..."
보드를 붙잡은 라자로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바닷물을 먹었는지 속이 메스껍고 코와 귀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먹먹한 귀는 한참이 지나서야 주르륵 물이 흘러내리면서 주위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아득하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자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실력도 안 되는데 무리해서 파도를 탔더니.. 이 꼴이 났네. 하하."
라자로는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가 미안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아저씨는 오늘 처음 보드를 타시는 건데.. 제가 성급하게 파도 타자고 했네요. 죄송해요. 저도 일주일은 연습하고 파도에 올라섰는데..."
"아니야. 네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어. 고마워. 근데 네 이름은 뭐니?"
"저는 마누엘이에요."
"반갑다. 마누엘. 나는 라자로라고 해. 너는 누구에게 서핑을 배웠니?"
"형에게 배웠어요. 우리 형은 벌써 5년째 파도를 타고 있거든요. 내년에는 대회에도 나간대요."
"이야.. 대단하구나. 형처럼 너도 파도를 잘 타니.. 너도 곧 형을 따라서 대회에 나가겠구나."
마누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라자로는 제대로 서핑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아이에게 라면 파도 타는 방법을 잘 배울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마누엘. 내게 파도 타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겠니? 대신 아저씨가 맛있는 저녁 살게."
"우와! 진짜요? 그럼 저기 피자 가게에서 콜라 사주실 수 있어요?"
마누엘이 말하는 대가가 너무 소박해서 라자로는 웃음이 나왔다.
"그럼. 피자도 사줄게."
"신난다! 좋아요. 그럼 아저씨. 저를 따라 해변으로 나오세요."
"으잉? 바다에서 배우는 게 아니었어? 왜 해변으로 가니?"
마누엘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처음 자세를 배울 때는 땅에 보드를 내려놓고 그 위에서 차근차근 배워야 해요. 저도 그렇게 배웠어요. 얼른 따라오세요."
해변에서 마누엘은 라자로의 보드를 바닥에 깔아놓고 서핑의 기본자세를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라자로는 마누엘이 알려주는 대로 보드 위에 엎드렸다가, 양팔을 차례대로 움직이며 헤엄치는 자세를 연습했다가, 보드 위에 엎드린 몸을 순식간에 일으켜 발을 딛고 일어서는 동작을 계속 반복하였다. 마누엘은 어른인 라자로가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열심히 동작을 따라 하는 게 재미있는지 깔깔 웃으며 신나게 라자로를 가르쳤다. 마누엘이 보여주는 동작들을 세심히 살펴보며 라자로는 차분하게 몸을 움직였다. 파도를 타기 위해 배워야 할 자세들은 언뜻 보기에 단순했지만, 막상 따라 해보니 섬세하고도 복잡한 동작이 많았다. 라자로는 부분 동작으로 나누어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훈련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온종일 무더운 사무실에 갇혀 똑같은 문서를 수십 번도 더 검토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던 라자로는, 탁 트인 해변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몸을 움직여 새로운 동작을 익히는 과정이 신선하고 즐거웠다.
"이제 많이 능숙해지셨네요. 아저씨. 조금만 더 연습해 보고 바다로 나가보세요."
"고맙다. 더 연습한 뒤에 도전해 볼게."
"네. 그럼 저는 또 파도 타러 갈게요."
마누엘이 밝게 웃으며 자기 보드를 집어 들고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마누엘이 떠난 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도 라자로는 진지한 태도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맞는 올바른 자세를 찾아내고 싶었다.
'오른발을 앞으로 디디니 어색하네.. 왼 발을 앞쪽으로 디뎌볼까? 팔의 움직임은... 보드의 흔들림에 맞추어 허리와 팔을 움직이며 밸런스를 잡아야 하는구나.. 엎드렸다가 일어설 때 동시에 두 발을 내딛는 게 아직 어렵네.. 한 발씩 빠르게 딛으려면... 옳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라자로는 중얼중얼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같은 동작들을 끝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 열중하고 있는데 마누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아직도 여기서 연습하고 있었어요?"
"응... 아직 다 익히지 못한 동작들이 있어서."
"우와. 아저씨는 끈기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오랫동안 쉬지 않고 연습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으잉? 오랫.. 동안이라니?"
의아한 표정으로 라자로가 주위를 둘러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서 저녁노을이 피어나고 있었다. 서핑을 즐기던 사람들도 하나 둘 바다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누엘이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해가 다 지기 전에 한 번 더 파도 타러 가요. 제가 도와줄게요."
"그... 그래. 정말 고맙다."
라자로는 보드를 들고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옆에서 걷고 있는 마누엘을 보니 든든했다. 보드를 바닷물에 띄운 라자로는 능숙하게 보드 위로 올라서서 파도를 향해 팔을 젓기 시작했다. 마누엘은 라자로의 보드 앞부분을 잡고 함께 헤엄쳤다.
"아저씨. 우선 낮은 파도에서 도전해요."
"알겠다. 그러자꾸나."
마누엘은 라자로의 보드를 해변 방향으로 돌린 후 보드의 뒷부분을 잡아주며 말했다.
"연습한 대로 제가 업(up)하고 말하면, 단숨에 일어서는 거예요. 아시겠죠?"
"응. 해볼게."
라자로를 태운 보드가 물결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라자로는 집중했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서 보드를 통해 전해지는 바닷물의 흐름과 함께 온몸의 근육 하나하나의 움직임까지 예민하게 감지했다. 파도가 보드를 들어 올리는 한 순간, 단숨에 몸을 솟구쳐 보드 위로 정확한 자세를 잡아야 한다. 호흡을 가다듬은 라자로는 육지에서 수없이 반복한 동작들을 머릿속으로 계속 떠올리며 마누엘의 신호를 기다렸다. 순간, 보드가 급격히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업(up)!"
마누엘이 외쳤다. 라자로는 몸을 솟구쳤다. 두 발이 보드 위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엎드렸던 동안 가슴에서 느꼈던 압박감이 순간 사라졌다. 보드를 높이 들어 올린 파도가 해변을 향해 맹렬히 질주했다. 처음 느껴보는 속도감.... 모든 감각들이 생생하게 깨어났다. 시원한 해풍이 온몸에 부딪쳐왔다. 푸른 바다, 갈매기, 주위 사람들... 눈에 감지됐던 모든 피상체들이 순식간에 시야 뒤편으로 사라졌다. 파도가 거세게 몸부림치며 보드에 가하는 충격에 대응하여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팔과 허리, 다리와 발, 육신의 모든 부위들이, 라자로의 의지에 따라 흐트러짐 없이 작동했다. 거칠게 꿈틀거리는 파도도, 끝까지 보드 위에 머물겠다는 라자로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보드 위에서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통제하며 거친 파도 위를 질주하는 동안 라자로의 내면으로 기이하고도 벅찬 환희가 가득 차올랐다. 해변 가까이에서 결국, 균형을 잃고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에도 라자로의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우와! 아저씨! 잘했어요! 어떻게 한 번만에 해내죠? 진짜 대단해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 멍하니 서 있던 라자로는 고개를 돌렸다. 마누엘이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라자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 높이 휘두르며 포효했다.
"으아아! 해냈다! 내가 해냈어!! 해냈다구!! 으하하하하!"
이토록 가슴이 터져라 소리치며 웃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라자로는 오랫동안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라자로는 달려온 마누엘을 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얼싸안고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라자로의 첫 파도타기를 축하했다.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도 라자로의 성공을 축복하려는 듯, 해변 위에서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두 사람의 몸 위로 부드럽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