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억엔

꼬리표가 있다.

by 적적

금요일 아침입니다. 이제 반팔 차림으로 밖을 나서는 건 멈칫하게 되는 기온인 것 같습니다. 물론 햇살을 보면 그대로 나가서 따스함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면역력이라 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게다가 유행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고 싶어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유행하는 감기를 달고 살았습니다. 늘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며 살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T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어요. 동네에선 꽤 유명했었죠. 학교에서 늘 조회 시간마다 단상에 올라 상장을 받는 아이였죠.


T의 엄마는 그런 상장을 받을 때마다 떡집에 가서 시루떡을 해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어요. 동네 아줌마들은 나도 떡집에서 떡 한 시루 해다 동네에 나눠주고 싶다고 서로 속삭이기도 하였죠.


그런 우수했던 T의 날들은 영원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영원할 것 같은 날들은 계속되었죠.

T가 유명대학에 단번에 입학을 했을 때도, 장학금을 받았을 때도,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도, 식탁엔 작은 은박접시에 시루떡이 놓여있었죠.


T는 입사 후 출근 시간만 있고 퇴근 시간이 없는 삶을 오랜 시간 동안 견뎌내다가 결국 퓨즈가 끊어진 사람처럼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회사는 퇴사를 하고 다른 동네에 작은 구멍가게를 내고 손님이 없을 땐 책을 보고 직장에서 돌아오는 친구들에게 맥주를 따를 유리컵을 내주거나 마른오징어를 구워내 오거나 가게 앞 파라솔을 펴고 접으며 살았어요.

웃지 않던 T도 가끔 웃는 모습을 보이더니 그 동네 아주 순한 얼굴을 한 여자아이와 결혼했어요. 딸아이를 하나 낳고 온종일 붙어있던 가게에서 4시부터 5시 사이엔 동네 하나뿐인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돌아왔죠. 그즈음 건강을 위해 술도 끊고 담배도 끊어버렸어요.


친구들끼리는 절대로 금연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T는 한날한시에 모든 것을 끊고 독한 놈을 스스로 입증하며 동네 엄마들의 환호를 입게 되었죠.


T는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운동도 다닌다더라….


다른 아이들은 효심이 깊지 않으며 의지박약인 인간으로 낙인찍혀버렸죠. 그렇게 T는 엄마들의 가장 이상적인 아들이었어요. 말은 하지 않지만 가지고 싶은 아들 말이죠. 엄마는 가끔 대놓고 잘 때 몰래 너랑 바꿔오고 싶다고 까지 말씀하시곤 하였죠. 물론 그럴 수 없는 것은 T와 나는 외모가 너무 달라 금방 들통이 날거란걸 나와 엄마는 잘 알고 있었죠.

어느 날. 출근하는 길목에서 T의 슈퍼가 문을 열지 않은 것을 보게 되었죠. 괜한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지하철에 시달려 직장으로 실려 나간 나와 친구들은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다가 T의 아내가 보내온 T의 죽음을 알게 되었죠.


뛰던 심장이 멈췄다는 달리던 생각이 더 이상 걷지도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T의 작은 슈퍼로 달려갔는데 양철 문 앞엔 상중(喪中)이라고 쓰인 메모 한 장이 덩그러니 붙어있었죠.


심장마비라는 사인은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어요. T의 엄마는 며칠 사이 100년은 더 낡은 가구나 의자처럼 삐걱거렸는데 T의 아내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등에 업고 있던 딸아이를 내려놓지 않았어요.


가끔은 기억날 이유도 없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어떤 장면들은 피식 웃음이 나지만 어떤 장면은 뿜어져 나오는 피처럼 걷잡을 수 없이 손을 적시기도 합니다.


오늘은 머릿속에 커다랗게 걸린 영사막으로 T의 얼굴을 볼 것 같습니다.


떠오른 기억은 쫓아내지 못하는 저의 습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11월 첫날이 T의 기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유 없는 기억은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