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는 잠수복을 입고

마른침을 삼키며.

by 적적

때론 기억은 망각을 건너지도 뭍에 오르지도 않은 채 쳐다보면 거기 그렇게 있습니다. 수많은 기억을 싣고 기다리는 컨테이너 상선처럼.

어쩌면 기억이 나를 바라다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침대를 내려오는 일이 무척 힘든 아침입니다. 이불을 개어놓고 다시 나무 계단을 내려설 때 몸 안에서 연약한 힘이 솟아나는 걸 느낍니다. 영하의 날씨가 예보되어 있지만, 아직 길고 긴 패딩을 꺼내지 않습니다. 아니 옷장 문을 열고 꺼내면 되는데 지난여름 더 더워지면 에어컨을 켜야지. 마음먹었던 것처럼 12월 1일에 패딩을 꺼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너무나 추운 거리로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으로 한파를 겪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씨익 웃어주었습니다. 거울 속에 남자는 웃지도 않는데 말이죠. 한 사내가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거립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경고문을 붙이고 사라집니다.


고장 수리 중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나가 고장이 났으니 하나는 남아있겠지 하는 생각은 어디서 불쑥 나온 건지 모릅니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두 개의 엘리베이터는 서로의 고장을 떠넘기며 아래로도 위로도 불을 꺼뜨리고 있었습니다.


비상계단을 오릅니다. 4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는 중간 계단부터 인질로 잡혀있습니다.

복층으로 설계된 건물은 계단과 계단 사이가 다른 계단의 두 배의 높이쯤 된다는 걸 거기서 깨우쳤습니다. 움츠렸던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사라졌던 다리근육들이 절망하며 울부짖는 소리, 이마로 뜨거운 땀방울이 온몸으로 다시 스며드는 소리, 다리를 들어오려 다음 계단을 밟으면 발바닥이 계단 아래로 푹푹 빠져들었습니다.


꽤 쓸만한 기억 하나를 확인합니다. 마치 오래된 짐 속에서 발견한 잊혔던 물건을 보며 환히 웃는 일처럼. 어제 일도 기억이 흐릿한데 그 머나먼 기억의 발원지를 찾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헌책방에 들렀다가 이 책에 간택되었죠.


이 책은 그의 회고록이며 그의 절망의 전도서이며 담담하게 자신의 얘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장 도미니크 보비(프랑스어: Jean-Dominique Bauby, 1952년 4월 23일 ~ 1997년 3월 9일)

프랑스 잡지 편집자입니다. 그가 운전 중 갑자기 쓰러지고 락트-인 증후군 전신 마비 증세로 그때부터 그는 말을 할 수도, 혼자 힘으로는 먹을 수도, 어떤 일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숨쉬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의 몸 가운데 유일하게 신경이 살아 있는 곳은 왼쪽 눈꺼풀뿐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식물인간으로 변한 보비의 모습에 가족들과 친구들, 동료들은 그의 곁을 하나씩 떠나갑니다.

어느 날 보비와 친분 있던 출판사의 사장 오드와르 씨가 문안 차 보비를 찾아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는 보비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참지 못하죠. 그 와중에 그는 보비가 왼쪽 눈을 깜박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봅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눈의 깜박임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한 소설이 떠오른 것이죠.

그는 프랑스어의 각 알파벳을 눈 깜박거리는 횟수로 표시하기로 보비와 약속합니다. 자주 사용하는 문자는 되도록 눈을 적게 깜박거리고 마침표는 아예 눈을 감기로 했죠.

그 뒤 보비는 하루에 반쪽 분량씩 책을 써 내려갑니다.

그렇게 1년 3개월이 지났을 때 드디어 총 130쪽으로 된 「잠수복과 나비」라는 보비의 책이 완성되었어요.

책은 3월 7일 발간되고 보비는 자신의 온 힘을 쏟아부어 완성된 책을 보며 감격스러워서 했죠. 감격도 잠시, 1997년 3월 9일 그는 심장마비로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죠.

그의 책은 잠수종과 나비라는 영화로 만들어집니다.

드디어 녹슨 비상구 문을 열고 흐린 하늘을 바라다봅니다.


그리고 가만히 입 안에 마른침을 삼킵니다.


이제 뭐라도 해야죠.


이미 행복해져 버렸으니.



P.S. 다리가 풀려 걸을 수 없다고 대표님께 연락하면 어깨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형 화염방사기를 메고 온 집안을 불 질러버릴지도 모릅니다.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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