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숲을 떠나서
윤기 나게 지워지며
by
적적
Dec 10. 2024
아래로
따스하게 사라지
지
는 않을 것입니다.
남자는 어릴 때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남자가 살던 시절엔 나무 가운데 흑연이 박혀있던 필기도구를 사용했습니다.
한 손엔 칼을 다른 한 손엔 그 나무를 쥐고 흑연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칼끝에 힘을 부드럽게 줍니다. 반짝이고 촉촉한 흑연이 나타납니다.
나무와 흑연의 부드러운 경계가 감싸 쥐고 있는 단면을 따라옵니다. 좀처럼 부서지지 않는 한 몸이 됩니다.
남자는 나무 깎는 일을 사랑합니다. 흑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연필을 잘 깎는다는 칭찬을 듣고 나자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남자는 온종일 나무를 깎아 흑연이 종이에 닿기 좋은 굵기를 유지해 돌려줍니다.
남자는 나무를 깎는 일을 사랑합니다. 나무를 깎는 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는 일을 생각합니다. 광산으로 가 흑연을 캐는 일을 상상합니다. 부드럽고 폭신하게 반죽됩니다.
가마 안에서 가열됩니다. 도자기처럼
단단해집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흑연을 넣고 다시 결합됩니다.
중심을 자리 잡도록 정확히 잘려 나갑니다. 돌아오지 못하게 결별합니다.
사라질 때까지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연필을 깎는 일을 상상합니다.
남자는 가끔 칼을 쥐었던 오른손 검지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어봅니다.
사라지지 않는 굳은살은 시간을 기억합니다. 쥐고 있던 칼을 기억합니다.
지워지는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밑그림으로 사라지더라도
오늘 아침 숲을 베어냅니다.
사진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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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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