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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봄날은 복화술사였다

입술을 벌리지 않아도

by 적적

바람이 부드럽게 풀잎을 스치며 나른한 속삭임을 남겼다. 햇살은 물결처럼 퍼져나가며 대지를 감쌌고, 먼지조차 부드럽게 빛을 머금고 춤추었다. 언제나 조용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뭇잎에 내려앉은 햇살처럼 가만히, 분명한 존재로. 손길이 스친 자리마다 봄은 조금 더 선명한 색을 입었고, 말이 들리는 곳마다 계절은 한층 더 깊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실이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와, 봄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사람들은 그를 ‘복화술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인형을 조종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실려 나뭇잎 사이를 부드럽게 스쳤고, 그의 손짓은 강물의 흐름을 따라 유유히 번져갔다. 그는 오직 봄날의 공기 속에서 언어를 빚어냈다. 아침의 새들이 한 음 한 음을 고르고 다듬어 노래하듯, 오후의 나비가 빛 속에서 가녀린 날갯짓으로 춤추듯, 그의 말은 조화를 이루며 은은한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들꽃이 살며시 피어나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선명한 울림을 남겼다.



그가 입을 열면, 사라졌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창가에서 듣던 봄비의 잔잔한 속삭임, 할머니의 뜰에 가득 피어 있던 진달래 향기가 공기 속에서 은은히 번졌다. 따뜻한 바람이 살며시 뺨을 스치던 감각과 함께, 멀리서 들려오던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말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색과 소리, 그리고 촉감을 다시 불러오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의 곁에 앉은 사람들은 시간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장면을 바라보듯,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봄날이 간직한 모든 흔적과 향기를 담고 있는 언어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낡은 책 한 권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표지는 바라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지만, 손때 묻은 흔적이 오래된 기억을 품고 있는 듯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들려오는 바삭거리는 소리는 귓불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 안에는 봄날의 메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고, 몇몇 페이지는 바람에 뜯겨 나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흔들었고, 빛바랜 표지가 햇살을 받아 미세한 결을 드러냈다. 그는 천천히 책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가 손끝에서 살짝 거칠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가 조심스레 접었다 펴기를 반복한 흔적 같았다. 책 속에는 말로 다 표현되지 못한 시간이 물밑으로 잠겨 있었다.


바람에 흩어진 문장들, 햇살 아래 희미해진 감정들, 그리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순간들이 책장 사이에 살며시 숨어 있었고, 한숨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그의 손끝이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길 때마다, 종이 위에 스며든 시간이 희미한 향기로 되살아났다.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잃어버린 봄날을 하나씩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퍼져나갈 때, 창밖의 바람도 조용히 숨을 죽이는 듯했다. 말이 끝날 때쯤, 소녀의 눈동자는 놀라움과 아련함으로 빛났다.


그 봄날을 기억하시나요?


그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더욱 자주 그의 곁을 찾았다. 어떤 이들은 어릴 적 정원에서 알록달록한 꽃들 사이를 뛰놀던 순간을 떠올렸고, 어떤 이들은 오래된 연인의 손길이 스치던 나른한 오후를 기억했다. 그의 목소리는 시간의 벽을 넘어 잊힌 감각들을 되살렸고, 그의 말 한마디에 공기 속에는 희미한 꽃향기가 번져갔다.


그는 여전히 인형을 조종하지 않았다. 대신, 사라져 가는 기억을 조용히 어루만지며 다시 불러내는 복화술사로 남았다. 그리고 모든 봄날이 그의 목소리를 타고 다시금 피어났다. 잊힌 순간들은 마치 새순처럼 돋아났고, 계절은 그를 통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가 떠난 후에도,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바람 속에 남아 있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어느 오후, 누군가는 오래된 벤치에 앉아 그의 음성을 떠올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 잔잔히 흔들리는 꽃잎의 그림자, 바람결에 실려 온 미묘한 향기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봄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듣는 법을 잊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의 말은 여전히 봄을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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