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늦봄, 아가미를 열어두고
물비늘이 창문을 두드린다. 유리 너머로 일그러진 풍경이 천천히 움직인다. 목소리도 없이, 어떤 다짐처럼. 늦봄의 비는 대개 조용하게 시작된다. 소리보다 냄새가 먼저 온다. 젖은 흙과 기척 사라진 꽃잎 사이에서 피어오른 초록의 향. 그것은 오래전 기억을 더듬는 손길처럼 코끝에 머물다 사라진다.
비가 그치면 모든 것이 조금 더 가까워져 있을 것 같은 착각. 그렇게 속절없이 가까워진다, 잊으려 했던 이름들과, 끝내 지우지 못한 장면들.
낮은 담벼락 아래에서 민들레 씨앗이 한 무리 모여 있다. 바람도, 햇빛도 닿지 않는 오후인데, 그들은 조용히 부풀어 오른다. 어디론가 떠날 준비 중인 것처럼.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며. 흙은 눅눅하고, 흙 위의 발자국은 어제의 무게를 기억한다. 그 위를 걷는 일은 어쩌면 과거를 밟는 일. 한 걸음마다 발목 아래로 쓸려내리는 감정들, 감정의 진흙.
심장이 아가미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숨이 아니라 물을 들이쉬고 싶은 날. 공기에는 더 이상 위안이 없고, 혀 아래로 스며드는 빗물의 짠맛이 날 것 같은 순간. 폐는 건조하다. 감정이 먼지처럼 쌓이고, 그 먼지가 기관지를 막는다. 말은 갈라지고, 침묵은 더 짙어진다. 그럴 때, 빗물은 은밀한 위협처럼 다가온다. 껍질을 벗기려는 듯, 속살을 드러내려는 듯. 더는 피할 수 없는 어떤 요청처럼.
고요한 건널목에서 손잡이가 굽은 우산들이 천천히 움직인다. 우산 속 얼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모두가 서로를 모른 척하며 스쳐 지나간다. 비는 익명성을 부여하고, 얼굴 없는 사람들은 잠시나마 자유롭다.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자신을 감춘다. 머리보다 마음을 더 깊이 눌러쓰고 걷는다. 모자란 감정들은 비 속에서 증발하고, 넘친 감정들은 배수구로 흘러든다. 그렇게 늦봄은 조금씩 사라진다. 흘러간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가미를 여는 일은, 스스로를 믿는 일이다. 익숙한 호흡을 포기하고 낯선 수면 속으로 뛰어드는 일.
옷깃이 축축하게 젖는다. 손목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맥박처럼 느껴진다. 그 물줄기 위로 오래된 기억들이 떠내려간다. 어린 시절의 어느 오후,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다 엉덩이가 젖었던 기억. 고무 그네에 앉아 끝없이 흔들리던 어떤 날. 푸석한 빵을 씹으며 바라보던 창밖의 빗줄기. 모두가 떠난 다음에도 끝내 잊히지 않던, 어떤 눈빛 하나.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아가미를 통해 새어 나온다. 말로 꺼내지 못했던, 사라지지도 않았던 것들. 비는 그것들을 데려와 하나씩 만지게 만든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체온으로, 무심한 듯 다정하게.
문득, 버스 정류장에 선 여자의 뒷모습. 그녀의 어깨 위에 빗방울이 맺히고, 어깨너머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않음에도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비는 뒷모습을 더 정직하게 만든다. 나아가는 사람들의 각오와 주저함이, 무심히 흘러내리는 빗줄기 사이에서 더 선명해진다. 말없이 흘러가는 존재들의 침묵 속에서, 비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말할 수 없을 때, 비는 대신 이야기해 준다.
도시의 물웅덩이 속에 하늘이 잠긴다. 그 안에서 구름은 분해되고, 나뭇잎은 오래 머문다. 우산아랫사람들은 그 하늘을 밟고 지나간다. 무심한 듯, 조심스럽게. 늦봄의 빗소리는 낮고 묵직하다. 마치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참아온 울음처럼. 그 울음을 견디는 사람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아가미를 연다. 누군가는 피아노 앞에 앉고, 누군가는 오래된 책장을 연다.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모든 행동이 저마다의 호흡이다.
방 안은 어둡고 조용하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그림자처럼 벽을 훑는다. 전등을 켜지 않은 실내,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고, 감각은 더 예민해진다. 그 안에서 마음은 천천히 펼쳐진다. 마치 오랫동안 굳어 있던 무언가가 물기를 머금고 조금씩 풀리는 것처럼. 그 마음은 비를 닮았다. 침묵과 침잠, 그러나 분명한 움직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꼭 닿고 싶은, 그런 마음.
늦봄의 비는 모든 것을 적시지는 않는다. 비는 가려서 젖게 한다. 선택적으로, 분명하게. 아가미를 열 수밖에 없도록, 더는 숨을 참을 수 없도록. 그리하여 결국 자신에게로 다가가도록 만든다. 익숙한 물을 버리고 낯선 물속으로 가라앉는 일. 그것이 삶의 방향이라면, 비는 늘 제때에 도착하는 안내자다.
비 오는 늦봄, 살아 있다는 건, 끝없이 적셔지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도 들리는 소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침묵 속에서 서서히 열리는 아가미가 결국 생의 가장 단단한 숨결이라는 것을.
젖어드는 목덜미를 손으로 닦아낸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