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결을 지닐 것인가.
물기 가득한 하루, 유리창 위로 수직의 선들이 쉼 없이 그어진다. 늦봄의 비는 여느 봄비와 달랐다. 그것은 따스함이 아닌 격렬함으로 계절을 밀어내고 있었다. 장마라 하기엔 이르고, 소나기라 하기엔 너무 지속적인 그것. 거센 비는 마치 오래 눌러 담은 어떤 감정을 쏟아내듯, 시야를 지우고, 거리의 표정을 씻어내고 있었다.
유리창은 비로 인해 또 하나의 피부가 된다. 실내와 외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안과 밖이 서로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다. 수직의 비는 창에 닿아 다시금 흘러내리며 무수한 선을 직조한다. 그것은 마치 기억이 맺히고.
흘러내리는 어떤 의식의 결처럼, 유리창 위에서 하나의 직물이 되어간다. 누군가는 그것을 단지 빗물이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문장의 골격이 숨어 있다. 지워지고, 겹쳐지고, 다시 쓰인 비문(非文)들의 연속. 늦봄은 그렇게 문장 아닌 문장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비는 흔히 정화의 이미지로 불린다. 그러나 이 비는 무엇을 씻기보다, 오히려 무엇을 남기고 있었다. 유리창 위에, 사람의 시선 위에, 기억의 가장자리에. 빗물이 지나간 자리엔 흐릿한 지문 같은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도 이 창을 지나갔던 누군가의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창문은 오래된 눈이다. 바깥을 보는 눈이자, 안쪽을 비추는 거울 같은 것. 비가 그것을 문지르면 묵혀 두었던 사유들이 떠오른다. 마치 무의식 속 어딘가를 흔드는 파동처럼.
늦봄의 거센 비는 모든 것을 쓸어간다. 개나리의 잔해, 떨어진 꽃잎들, 창틀에 붙은 오래된 먼지들, 그리고 말하지 못했던 문장들까지. 그러니까 이 비는 단지 계절의 변두리에 머무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어떤 내면적인 구조물까지 함께 무너뜨리는 존재다. 거리의 색들이 무채색으로 탈색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조용해진다. 어딘가에서 공명처럼 울려오던 생활의 소리가 하나둘 사라지고, 오로지 비의 소리만이 귓속에 남는다. 그것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소리다. 혹은, 모든 기다림이 끝났다는 선언일 수도 있다.
커튼을 젖힌다. 유리창 너머로 격렬한 선율이 흐르고 있다. 바람은 비를 밀어 창에 붙이고, 창은 그것을 통과시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 저항의 느낌이 창문에 진동으로 남는다. 한낮임에도 방 안은 어두컴컴하다. 어둠은 저녁의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늦봄의 비가 내리는 오후에도 찾아올 수 있는 감각이다. 그것은 빛이 꺼진 후가 아닌, 빛이 차단된 순간의 정적에서 비롯된 것. 사물들은 그 안에서 경계를 잃고 흐려진다. 조명 아래의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으로 부유하는 시간.
창문을 바라보다 보면 자꾸만 오래 전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어릴 적 살던 집, 커다란 거실 창에 매달려 비를 보던 어느 여름 직전의 날들.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넣고 거기에 무언가를 썼던 손가락의 감각. 금세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리던 동그라미, 이니셜, 엉뚱한 모양들. 유리 위에 남겨졌던 그 사소한 소묘들은 이제는 기억에서조차 흐릿해졌지만, 그때의 촉감만은 이상하게도 손끝에 남아 있다. 비는 그 감각을 다시 불러온다. 잊혀진 시간을 물처럼 길어 올린다.
도시는 비에 젖으며 점점 내부로 침잠해 간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우산 아래 숨어든 표정들, 벽면에 기대선 채로 멍하니 비를 바라보는 눈빛들. 늦봄은 그렇게 사람들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밀어 넣는다. 언어로 수습할 수 없는 감정의 잔해들 속에서, 유리창은 점점 언어의 구조로 변해간다. 사람들은 창을 보며 무언가를 읽는다. 그리고 그 문장을, 삶이라는 물성 속에서 곱씹는다.
그 비는 결국 지나가겠지만, 창에 남겨진 물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유리창 위의 무늬가 아니라, 삶의 어떤 시점에서 생긴 금처럼 남는다. 늦봄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름이 오겠지만, 그 사이의 틈을 채우는 것은 이 비다. 거센 비, 유리창, 직조된 시간. 이 모든 것이 혼재된 순간에서야 비로소 느껴지는 어떤 진실이 있다. 그것은 말로는 붙들 수 없지만,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형태 이전의 감각 같은 것.
유리창 너머의 세상은 여전히 흐릿하다. 그러나 그 흐릿함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침묵 속에서만 들리는 말들이 있다. 늦봄, 거센 비, 그리고 유리창의 직조. 그것은 단지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한 시절의 결이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 통과해야 할 사유의 감촉. 물러나는 계절과 다가오는 시간 사이, 그 불확실함의 틈에 서서, 사람들은 다시, 빗물의 문장을 읽는다.
유리창 위에는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다. 절대로 닦이지 않는 자국, 바깥의 세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굴절의 흔적. 누군가는 그것을 얼룩이라 부르겠지만, 그것은 실은 지나간 시간의 문자였다. 말로 하지 못한 감정들이, 발화되지 못한 문장들이, 비의 리듬을 따라 창에 박힌 것이다. 그것은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할 것이었다. 삶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가장 사소한 순간이 가장 오래 남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간 계절이 가장 깊이 스며든다. 유리창은 다시 맑아질 테지만, 한 번 스쳐 간 비의 직조는 마음 어딘가에 끈질기게 남는다. 빗물로 새겨진 문장은 종이 위가 아닌 마음 안에 적히기에, 누구도 그걸 다 읽지 못하고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그 흔적을 가지고, 사람은 다음 계절로 건너간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른 풍경을 품은 채.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