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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지켜준다면..

우린 어제 보다 조금 더..

by 적적

이름이 수없이 기재되어 있는 숙박부엔 나의 이름과 매번 다른 싸인이 가득하다

한동안 이곳에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다 이 집의 유일한 장기투숙자였던 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현관문을 닫고 현관문 틈새마다 테이프를 붙이기 시작하는 사내의 익숙한 손놀림을 바라보던 사내 곁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밖에서 묻혀 온 냄새를 지우기 위해 제 몸을 비비다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지난번 현관문 틈새로 새어 나간 물로 현관 앞 복도가 물바다가 되어 민원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현관 위 스위치를 누르자 바닥으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놀란 고양이가 2층으로 뛰어 올라가고 사내는 가래를 토하듯 기침을 한다. 입 밖으로 겉이 촉촉한 오른쪽 폐를 토해낸다. 연이어 기침하자 왼쪽 폐를 토해낼 때쯤 천장에 매달린 지퍼백을 꺼내 아가미를 꺼내 무릎까지 차오른 물에 아가미를 적신 뒤 견갑골 근처에 아가미를 가져다 댄다 두 쪽을 붙이고 나서 꺼낸 폐를 다시 지퍼락엔 담아 공기를 뺀 뒤 천장 고리에 걸쳐둔다.


가슴까지 차오른 물속으로 고개를 숙인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현관문의 모서리 부분을 확인한다. 신발을 벗고 깊게 숨을 쉬자 아가미로부터 공기가 부드럽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 그가 가만히 물살을 휘저어 거실 쪽으로 나아간다. 집안은 고요하였다.

그가 전등을 켠다. 방수 처리된 책을 꺼내기 전 모니터를 눌러 컴퓨터를 켠다. 볼륨을 조금 높이자 소리가 물결을 탄다.

귀가 먹먹해지고 살갗에 닿은 음악 소리가 의자에 앉은 나의 모양을 남겨두고 벽 쪽까지 일렁거린다.


이 층으로 올라간다. 고양이가 천장과 거실 그리고 창가 집 안 구석구석으로 연결된 유리 관 앞에 기다리고 있다. 문을 가만히 열자 유리관을 통해 창가 쪽으로 뛰어가 창밖을 보며 그루밍을 한다.


집안은 물로 가득 차올랐고 그가 벽이나 천장에 부딪힌 음악의 파장을 살갗으로 느끼며 집안 구석구석을 헤엄쳐 다닌다. 집안에 한 번 들어왔다 나가려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가구들은 고정식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창가를 올려다보다 사무치게 들어오던 햇살을 먹고 자란 물이끼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물이끼들로 더욱더 푸른 밤이었다.


손가락 사이마다 물갈퀴가 느리게 자라나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온 사내는 지난밤 둔탁한 소리가 진공 포장된 폐를 끌고 다닌 소리였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29도의 미지근한 수온에 습도가 90%를 넘나드는 날씨였다. 습기로 가득한 폐는 다시 꺼내 진공 포장해 두었다. 오늘 사용하는 것은 보류된다. 목덜미 옆에 아가미를 화장실 세면대에서 급하게 적셨다.


오늘은 폐 대신 아가미를 붙이고 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송곳처럼 예민해져 있을 하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아가미를 적신 뒤 급하게 옷을 입고 엘리베이터를 타자 5층에서 한 남자가 들어선다. 목젖에서 5cm 양쪽에 붙인 아가미는 오래 사용된 운동화처럼 낡아 있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 문지른다.


큰 길가로 나가자 다가오는 습도로 숨은 좀 쉴만했다. 가끔 건조한 곳에 가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다보는 척하며 입을 뻐-끔 하면 된다. 누구도 하늘을 바라다보는 사람에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눅진해진 대기로 사람들은 의외로 평화로워 보인다. 건널목을 지나 퇴화한 꼬리지느러미가 간혹 갈 곳의 반대 방향으로 뒤척인다.


다른 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며 아가미를 흠뻑 적셔 숨을 쉰다.

오늘은 목덜미가 드러나보이지 않는 카라옷을 선택해야한다. 목이 드러난 옷을 입으면 아가미 끝이 풀린 실밥처럼 나풀거리는 것이 눈에 뜨일 것이 분명하니까 물론 그렇게 가까이 다가서거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겠거니와 자기들끼리 수군거릴 때쯤 되면 직장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있다.


나조차도 모른 척 오늘을 보내야 한다.


아가미가 마르지 않도록 계속 목덜미를 물로 적시며 또 그 목덜미가 너무 젖어있는 것을 눈치챌 수 없도록.


모란이라는 이름의 고양이로 인해 하루가 번거로울 것 같다.


그리고도 저토록 평화로운 동물은 지상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전 한 컵의 물을 손바닥에 적셔


목덜미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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