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가끔 긴 호흡으로 생각이 머물러
죽고 나서도 무용한 것
가슴에 닿으면 유용해지는 곤 해
by
적적
Oct 11. 2024
아래로
교묘하고 사악하게 세탁기에서 모든 일을 끝냈다는 소리를 냅니다. 세탁기였구나 어서 일어나 세탁기 문을 열고 젖은 빨래를 건조대에 널어야 해 지금 널지 않으면 빨래들은 늦게 문을 연 형벌로 시큼한 냄새가 날 거야.
아직 회복되지 않고 길게 늘어진 팔목을 바닥에 끌며 빨래들을 허공에 털어냅니다. 탈수를 끝낸 빨래는 금요일 밤 11시의 지친 나처럼 어깨는 처져있고 모든 곳에 구겨져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기온만으로 옷을 입으면 한낮동안 땀을 흘리는 계절입니다.
며칠 전 카톡으로 친구가 구입한 물건을 구경했습니다.
장식품으로 낡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물건이었습니다. 다들 물건의 이유를 묻기도 하였습니다. 그 물건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모르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남자들의 단체 카톡 방은 고요합니다. 색다른 일도 없고 숫자는 잘 사라지지도 않으며, 아주 짧은 대답과 감정표현도 호응도는 바닥에 가라앉아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한 친구는 남들 다 놀 때 아이를 키우고 아내와 다투느라 늘 힘에 겨워했습니다.
커다란 비닐봉지가 화면에 나타나고 작은 박스 하나 그리고 단단히 결박되어 있던 물건의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누든 칫솔이든 주물로 만든 프라이팬이나 자동차 그리고 평수가 늘어난 집이든 기쁨은 구입한 사람의 얼굴까지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친구의 장바구니에는 수많은 물건이 잠들어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던 모든 물건을 제치고 그가 구입한 물건은
메. 트.로. 놈
그놈이었죠.
어릴 적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들고 와서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물건이었다고 만져보고 쓰다듬어보고 뒤집어 보고 싶었지만 교탁 위에 물건을 바라만 봐야 했었다고.
늘 실용적인 물건만 샀었는데 한 번쯤 무용한 물건을 사고 싶었다고 그뿐이었다고 아내와 아이들이 계속 물어보니 왜 샀는지도 지금은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의 물건을 구입합니다. 음식이, 생활용품이, 건강 보조식품이, 그리고 유행이 지나지 않은 옷가지들이.
그래…. 그런 물건 하나 있어야지. 살아가는데 하나 도움이 안 돼도 바라보고 있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날의 나를 천천히 알아거게 되는 물건.
좌우로 움직이며 치우치지 않는 무더운 여름날과 선선한 가을날을 직선 위의 추를 바라다보며 하염없고 고즈넉해질 무언가가 너도 잠시 되어보는 거지.
잘했어 친구야
keyword
감성에세이
에세이
감성글
26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멤버쉽
적적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구독자
701
구독
월간 멤버십 가입
월간 멤버십 가입
매거진의 이전글
비밀을 지켜준다면..
헌책방 수몰예정지구.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