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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수몰예정지구.

기억은 물에 잠겨도

by 적적

수련을 만지작거리면 손끝에서 협곡의 지문을 따라 물이 흐른다. 바닥에 고인 호수를 당황한 내가 받아 마신다. 바닥은 젖지 않는다.

그림 한 점 없는 책은 바닥에 눕고 순장된 활자들은 무덤을 파내고 기어 나와 기운 잃은 문장끼리 모여 앉아 탈옥한 종이를 말아 담배를 핀다 책은 갈피를 넘길 때마다 묻힌 다른 타액으로

비 맞은 고양이 냄새.


집 근처 헌책방이 있습니다. 제일 처음 집을 옮길 때 가까운 헌책방이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서점 꽤나 들락이던 책은 이곳에선 살아있는 사람이 공동묘지를 한낮에 어슬렁거리는 일이라서 신간 서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미 죽거나 죽어가고 있거나 식물처럼 누운 책을 뒤적이며 살려내고 싶은 문장을 빠른 눈으로 고르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방문한 날은 장정일의 악서총람이 입고되었다는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곤 모네의 호수, 수련이 피어있는 화첩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습니다. 바닥에 내려놓은 그림 사이로 수련 뿌리가 드러나고 그림 밖으로 호수가 바닥으로 다 쏟아져 내릴 동안 쳐다보고 만져보다 아주 거대한 마음을 먹은 기억이 납니다.

그날의 값비싼 화집은 어느 곳에서도 쓸모가 없는 사치품이었으나 한동안 나는 그 책에 지문이 남을 정도로 들여다본 기억도 납니다.


책은 나무였던 때를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숲에서 자라 벌목된 기억과 종이로 바뀌며 활자가 새겨지던 날과 제본된 날짜들을 생일처럼 기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헌책방에 도착한 날을 끝으로 더 이상의 책은 기억은 없습니다.


헌책방에 밤이 찾아옵니다.

제목은 별빛처럼 멀어져 흐려지고 행간으로 흐르던 강은 문단을 범람하며 차오릅니다.

어떤 밀림도 헌책방을 나갈 수 없지만, 누구라도 들어서면 다시 돌아갈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책은 주문할 순 있지만 언제 그 책이 도착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곳엔 기약 없는 약속의 메모지들이 등고선의 산맥처럼 쌓여있습니다. 비포장도로처럼 책이 쌓여있는 오솔길을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은 원하는 서적을 구입한다기보다 꽂혀있는 책들에 간택당한다고 하는 게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날의 기분이나 컨디션 혹은 날씨의 미묘-이 단어를 사랑할 수밖에-한 차이로 책이 눈에 들어오고 설레는 맘으로 책에게 선택됩니다.

아니 나를 선택할 책을 기다리며 책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나는 제법 거친 문장의 어깨에 둘러메어져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여자처럼


책등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납치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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