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의 틈에서 되살아나는 감각의 밀도
늘 같은 길을 걷는다. 지명이 기억나지 않아도 발이 기억하는 길. 구불거리거나, 눈에 띄게 굽은 곳 하나 없이 반듯한 도로 위를 걷는다. 건물은 제자리를 지키고, 나무는 제 계절을 통과한다.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가는 하루의 도심, 사람들이 빠져나간 대형 거울 같은 오후, 그 길 끝에는 작고 오래된 공원이 있다. 정원이라 부르기엔 무르고, 공원이라 하기엔 작고 조용한 공간. 나무들이 벤치의 그림자를 덮고, 어느 날은 바람이 멈추고, 어느 날은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 하나로 하루가 요동치는 곳.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엔 건널목이 있다. 그다지 주목받지 않는 횡단보도, 신호등도 없고 보행자 버튼도 없는 길, 도로 위 흰 줄만이 존재의 증거로 놓여 있다.
건널 수는 있지만 건너지 않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누가 막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멈추게 되는 지점. 그 앞에 선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지나가는 차들이 흘긋 돌아보며 지나간다. 아무도 멈추지 않는데 누군가는 멈춰 서 있다. 빨간불도 파란불도 없다. 그저 없다. 결핍이라기보다 결여. 신호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머뭇거림의 이유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비어 있는 자리일 뿐이고,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이 지나가는 곳이겠지만, 그 빈틈을 오래 응시할수록 무언가가 떠오른다.
가끔은 몸이 먼저 알아챈다. 아직 도로를 건너지 않아도 된다는 직감. 도시의 수많은 길들 중 유독 그 자리에만 머무르게 되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주변의 소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차들이 지나가고, 바람은 전깃줄을 흔들며 날아간다. 강아지 목줄이 팽팽해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흩어진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중인데, 그 자리에만 시간의 속력이 조금 늦다. 발은 멈추고, 눈은 저 멀리 서 있는 가로수들을 향해 가만히 나아간다.
신호등이 없는 자리에서의 기다림은 누가 시작한 것도 아니고, 누가 끝내줄 수도 없다. 그 기다림은 무언가를 통과하려는 의지라기보다, 잠시 그 안에 잠겨보려는 체념에 가깝다. 아니, 체념이라고 부르기에도 어딘가 미묘한 감정. 멈추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멈추는 일, 그 안에서 감각의 무늬가 번진다. 스스로 멈춘 순간, 세상도 조금씩 속도를 늦춘다. 자동차가 아니라 공기의 질감이 먼저 달라지고, 목덜미로 스치는 기온이 바뀐다. 소음이 아니라 침묵의 높낮이가 귀에 들어온다. 그제야 알아챈다. 이 자리엔 오래전부터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없어 보이는 것들이 가장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도시는 흐르고, 사람들은 바쁘다. 모든 신호는 초록으로 빠르게 점멸하고, 모든 도로는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그런 세계 속에서 하나의 멈춤은 균열이 된다. 그 균열은 흠이 아니라 틈. 그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모든 것을 지나치던 감각들이 되돌아온다. 공기의 온도, 나뭇잎의 결, 발바닥에 닿는 보도의 감촉, 누군가 먼 곳에서 흘린 말의 끝소리. 신호 없는 건널목에 머무는 일은, 실은 어떤 감각들을 되찾는 일이다.
하루의 어떤 시간, 도시의 경계에 쪼그려 앉은 몸. 차량의 물결 사이로 가만히 남아 있는 한 점의 정지. 그 정지에서 태어난 문장이 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쓰고 싶은 문장, 그 문장을 써야만 할 것 같은 어떤 충동.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발화에 가깝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몸 밖으로 배어 나오는 과정. 도시가 말하지 못하는 언어를 대신 짊어진 문장 하나가, 건널목 한가운데서 천천히 종이에 내려앉는다.
때때로, 기다림은 어떤 초대보다 강렬하다. 부르지 않았는데, 와버린 손님처럼, 설명되지 않았는데 앉아버린 감정처럼, 기다림은 종종 예고 없이 시작된다. 신호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서게 된 자리에, 세계의 모든 부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라진 시간, 흘려보낸 사람들, 말하지 못한 감정들. 신호가 없는 그 자리는, 모든 상실이 다녀간 뒤 남은 텅 빈 무대 같다. 조명이 꺼졌고 배우도 사라졌지만, 무대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 자리에 남은 공기, 그 공기가 기억하는 어떤 장면. 기다림은 그 장면을 되감는 일이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신호가 없는데 왜 멈추냐고. 혹은 무언가 고장 난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멈춘다는 것은 고장이 아니라 감응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반응한 것, 그 반응이 너무 조용해서 감정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그저 발끝의 정지로만 남아 있는 상태. 그것을 누가 비정상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 신호도 없는 건널목 앞에서 멈춘 한 사람은, 실은 세계의 가장 미세한 신호를 포착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말해지지 않는 신호, 보이지 않는 요청, 들리지 않는 울림을 향해 잠시 귀를 기울인 자.
그 건널목을 지날 수 있음에도 머무는 일,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반응이다. 반복된 습관이 아니라, 세계가 조용히 말을 거는 순간에 반응한 몸의 정직한 태도. 지나가는 사람은 그것을 오해한다. 목적지를 잃은 표류라고, 혹은 멈출 이유를 모르는 멈춤이라고. 하지만 멈추는 일은 목적을 잃은 게 아니라, 방향을 유예한 일이다. 가는 것을 잠시 미뤄놓은 채, 도착보다 ‘머묾’ 자체에 깃든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
어느 날엔 건널목 앞에 그림자가 둘이 되고, 또 어느 날엔 셋이 된다. 말없이 다가와 함께 멈추는 이들이 있다. 누구도 무엇을 묻지 않지만, 다들 무언가를 기다린다. 같은 이유는 아니다. 어떤 이는 지나간 계절을, 어떤 이는 무너진 시간을, 어떤 이는 떠난 존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자리는 그런 기다림이 겹쳐지는 자리다. 신호 하나 없는 공간에 각자의 결핍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그것은 정지된 움직임, 침묵의 대화, 멈춰 서야 비로소 들리는 시간의 잔향.
하루가 끝나간다. 차들은 점점 줄어들고, 공기는 낮은 색을 띠며 도로를 덮는다.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늘어난다. 그러나 그 건널목엔 여전히 신호가 없다. 누군가는 서고, 누군가는 지나치며, 누군가는 잠시 머물다 간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그 자리에, 매일 새로운 감정이 놓인다. 멈추는 자와 지나가는 자의 구분이 흐려지고, 누가 누구를 바라봤는지도 잊힌다. 건널 수 있는 길 앞에서 멈춘 사람들, 그리고 멈추지 않아도 좋을 감정들.
끝내 이 자리는, 어떤 신호도 내리지 않는다. 여전히 누군가는 기다린다.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를 통과하지 못한 감정들이 이곳에 잠시 머문다. 세계는 다시 움직이고, 도시는 제 속력을 되찾는다. 하지만 그 건널목만은 여전히 빈자리로 남는다. 존재하지 않는 신호를 향해 조용히 손을 들어보는 사람들. 그들의 몸이 기억하는 것은, 지나간 누군가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다.
끝내 이 자리는, 어떤 신호도 내리지 않는다. 정지하라는 명령도, 통과하라는 허락도 없이 그저 거기 있다. 허공처럼 존재하면서도 쉽게 비껴갈 수 없는 어떤 결을 품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인식하거나, 애써 지나친다. 하지만 아주 가끔, 발끝에 걸리는 침묵을 느끼고 고개를 드는 이들이 있다. 이유 없이 속도를 늦추는 몸, 의미를 묻기 전에 감각이 앞서는 사람들. 그들만이 그 자리에 숨어 있는 깊이를 잠깐 스쳐 간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떤 오래된 신호가 몸 안쪽에서 켜진다.
그 신호는 초록빛도 붉은빛도 아니다. 그것은 색이 아니라 밀도다.
시간을 응축한 감정의 무게, 말하지 못한 기억의 결, 지나간 존재들의 잔향이 떠다니는 응고된 공기. 그 밀도 안에 잠시 머물면, 모든 방향이 흐릿해지고, 어떤 목적도 무의미해진다. 목적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움직임, 그 안에서 고요히 진동하는 의식. 멈춤은 더 이상 지체가 아니라 감응이 된다. 세계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안, 그 움직임을 잠시 벗어난 존재만이 감지할 수 있는 진동. 그 진동은 작지만, 단단하다. 들리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신호 없는 건널목은 어떤 사람에겐 그냥 도로의 공백이고, 어떤 사람에겐 도달하지 못한 마음의 경계다. 그 경계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몸들은 사실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흘려보낼 수 없는 어떤 감각을 붙잡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지나간 누군가의 흔적이거나, 다가오지 않는 시간의 조각이거나, 혹은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자신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 둘 사이,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머무는 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 선다는 것은, 모든 신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자, 동시에 어떤 보이지 않는 신호에 가장 깊숙이 반응하는 일이다. 길 위에 서 있는 몸 하나. 아무도 바라보지 않지만, 모든 것이 지나가는 그곳. 그곳에 남은 몸은 더 이상 건너려 하지 않는다. 다만 들으려 한다. 말 없는 신호, 멈춤 속의 흐름, 고요 너머의 진동.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도달하는 어떤 감각. 그 자리에 남은 존재는, 실은 건너지 않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건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감각을 되찾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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