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한 편지

사진 속의 눈길을 피하지 않습니다.

by 적적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백 년 전 즈음 마지막으로 받았던 편지는 길가에서 노랗고 붉게 물든 낙엽을 책장에 끼워 넣고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어느 알 수 없는 이유로 우울한 아침에 책을 펼치면 나무로 만들어져 활자를 업고 있는 책장 속에서 잎맥만 남기고 살점이 모두 사라진 거대한 밀림의 지도처럼 변해버린 나뭇잎 하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뭇잎의 외곽으로 숲의 둘레길은 지하철 2호선 같습니다.


손 편지를 받았습니다. 단단한 크라프트지로 겉봉투로 겉봉이 싸여있습니다. 겉면에 정갈하게 그녀의 주소가 적혀 있고 아래쪽에 익숙하지만 좀처럼 사용하지 않은 주소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주소를 써본 적은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각선으로 봉투의 구획을 나누는 선 끝으로 작은 스티커가 붙어있습니다. 아직 홑씨를 날리지 않은 민들레 스티커가 붙어있습니다. 점성이 강한 풀로 밀봉된 봉투는 좀처럼 속을 열지 않습니다.


비교적 편지를 조심히 뜯는 저는 종이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했음에도 종이는 나무였을 때의 습성을 지녔으므로 가장 단단한 외피만 툭툭 떨어지며 안쪽 세상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열린 세상으로 편지가 들어있고 안쪽엔 연보라색 편지 봉투가 들어있습니다. 편지 봉투 겉면에 붙어있는 홀씨를 날리지 않는 스티커는 동일합니다. 아마도 편지를 부치기 위해 구입한 스티커가 분명해 보입니다.


보라색 편지 봉투는 딱 제가 원하는 만큼의 보랏빛에 닿아있습니다. 안의 내용물은 꺼내기 전부터 숨이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밀어 넣을 땐 모르지만 꺼낼 때는 봉투를 완전히 뜯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끈기를 가지고 보라색 편지 봉투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녀의 사진과 그녀와 함께 있는-사내가 어색하게 웃습니다. 사내의 최선을 다한 미소는 언제나 어색합니다. 차라리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나을 텐데.-사진이 한 장씩 들어있습니다.


사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진은 핸드폰에만 있었는데 순간이 종이 위에 가만히 놓여있는 걸 보자 낯설고 어색한 감정이 마구 책상 위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아마도 당분간 그런 일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인화된 적 없는 순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테니까요.

사진을 이 층으로 올라가는 기둥 위에 스카치테이프를 동그랗게 잘라 붙입니다. 사진의 폭과 자로 잰 듯이 맞습니다.

흐리고 낮은 하늘 아래로 포함됩니다.


야생 겨자를 개량해서 겨자의 꽃 눈을 비대화시키면 우리가 먹는 양배추가 됩니다.

겹 눈을 비대화시키면 방울양배추가 되고,

꽃과 줄기를 비대화시키면 브로콜리가 되고,

꽃을 비대화시키면 콜리플라워,

줄기만 비대화시키면 콜라비가 됩니다.

잎을 비대화시키면 케일,

끝 쪽 잎 눈을 비대화하면 배추,

심지어 개량 전 이파리는 갓, 김치를 만들어 먹습니다.

게다가 씨앗은 머스터드를 만드는 데 쓰입니다.


그것은 묘한 착각이겠지만 인화된 사진 속의 사람과 계속 눈이 마주칩니다. 어디에서 바라보든 나를 바라봅니다.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카메라가 들어있는 건 아닌지 살펴봅니다.


사악하고 낭만적인 계략은 주효합니다.

이젠 집 안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편지 봉투를 뜯는 순간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붙인 순간까지.

나무 위에 글자를 쓰고 나무로 감싼 뒤 다시 화학 처리된 종이를 다시 나뭇잎으로 감싼 뒤

우편함에 잠시 머물며 나를 기다릴 때까지.


돌연 부끄러워집니다. 칭찬을 하면 금세 볼이 빨개지는 세 살짜리 계집아이처럼


사진에서 말을 건넵니다.


산..책..다..녀..옵..니..다,.


흐리고 낮은 하늘 아래로 자꾸만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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