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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 활자처럼

너무 익숙한 냄새의 관계에 대하여.

by 적적

그해의 추석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하늘은 얇은 회색으로 늘어져 있었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아무 말도 없이 사람들의 몸을 감쌌다. 도시의 콘크리트 벽 사이를 비가 조금씩 적시고 있었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느리게 흩어지는 전조등의 빛, 버스 정류장에 서서 누군가가 들고 있던 비닐봉지의 투명한 표면, 그 위에 매달린 물방울 하나까지도 너무 생생해서, 그날의 시간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눌러둔 듯 느리게 흘렀다.



그때의 추석은 풍경보다 냄새가 먼저 떠오른다. 젖은 흙냄새, 전 부치는 기름 냄새, 그리고 오래된 장롱 속에서 꺼낸 한복의 낡은 냄새. 사람들은 여전히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묘하게 다르게 보였다. 기차역에서 들리는 안내방송이 희미하게 번지고, 플랫폼 위 사람들의 발소리는 물을 밟을 때마다 낮게 퍼졌다. 사람들은 손에 들린 선물상자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며, 그것이 무슨 약속이라도 되는 듯 품에 꼭 끌어안았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마당의 감나무 잎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졌고, 누군가는 처마 밑에서 작은 화로에 불을 붙였다. 불은 젖은 장작을 이기지 못해 푸석하게 타올랐다. 불길이 잠시 꺼질 듯 말 듯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기다림 자체가 명절의 형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거나, 이미 지나간 시간의 잔향을 기다리거나.



그해 추석은 이상하게 모든 것이 낡아 보였다. 텔레비전 화면 속 진행자의 웃음도, 식탁 위에 놓인 송편의 반질거림도, 심지어 그날의 대화조차 오래된 신문지처럼 눅눅했다. 모두가 서로를 향해 말을 건넸지만, 말의 끝에는 작은 간극이 남아 있었다. 마치 신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처럼. 표정은 분명 가까이 있는데, 목소리는 한 박자 늦게 들렸다.



비에 젖은 조간신문을 펼쳐 볼 때의 그 감촉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해의 공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문을 펼친다. 젖은 종이는 마치 오랜 잠에서 막 깨어난 동물처럼 둔하게 움직인다. 모서리를 잡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물기가 스며든 종이는 제 몸의 경계를 잃고, 손가락의 압력에 따라 느릿하게 비명을 지른다.


종이와 잉크, 물과 공기, 그 사이 어딘가에서 미묘한 마찰음이 들린다. 문장들은 이미 번져 있었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의 자리를 침범한 채 뒤엉켜 있었다. 검은 활자는 짙은 회색으로, 문단의 선들은 파도처럼 일그러졌다. 그 불완전함 속에 이상한 생기가 있었다. 활자가 녹아내리며 만든 얼룩은 마치 오래된 초상화의 그림자처럼,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손끝에 닿은 잉크의 냄새가 아주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비의 냄새와 섞인 잉크는 금속과 흙의 경계에서 나는 냄새였다. 조금만 더 펼치면 종이는 찢어질 것 같았고, 덜 펼치면 문장은 끝내 읽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불안정한 균형 위에서 손은 잠시 멈춘다. 활자 하나, 문장 하나가 제 모양을 잃으며 남기는 흔적을 바라본다.



그것은 사라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남으려는 시도였다. 비는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고, 그 소리가 종이 위에 남은 물방울들과 겹쳐진다. 종이는 그 모든 소리를 흡수하듯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읽히지 않는 문장은 오히려 또렷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손끝에 남은 감각으로만 존재했다. 젖은 신문을 펼친다는 건, 결국 사라진 문장을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사라진 시간의 체온을 다시 만지는 일에 가까웠다.



식탁 위에는 늘 그랬듯 명절의 음식이 차려졌다. 전, 나물, 잡채, 그리고 그날만큼은 특별히 정성껏 만든 갈비찜. 그러나 그 음식들조차 어느새 하나의 의식처럼 반복되는 제스처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음식을 집어 들며 오래된 사진 속의 자신을 다시 연기하듯 같은 말을 했다. 그 말들이 공기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창가에 앉은 노인은 신문을 바닥에 놓아 펼치고 있었다. 비에 젖은 신문이었다. 누군가가 잠시 바깥에 두었다가 깜빡 잊은 듯한 그것은, 이미 구겨지고 잉크가 번져 있었다. 노인은 신문을 펼쳐 보며, 읽을 수 없는 활자 사이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읽는다’는 행위보다 ‘기억한다’는 행위가 더 가까웠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보다 느리게 늙어버린 사람은, 결국 과거를 읽으며 하루를 견디는 법을 익힌다.



그날의 대화 중에는 아무도 크게 웃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침묵은 따뜻했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이해가 아니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 체념의 온도였다. 명절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돈을 더 벌었는지, 누가 이혼했는지, 누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지. 그러나 그 모든 사실은 이미 예전에 다 알고 있었던 진부한 기사처럼, 그날의 신문 속에 다시 한번 실렸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TV 앞에 모였다. 리모컨을 쥔 손끝에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면 속 연예인들의 웃음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밀어냈지만, 그 웃음은 너무 가벼워서 금세 허공으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졸고 있었고, 누군가는 창문 너머로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마치 신문지 위에 잉크를 번지게 하는 물방울 같았다.



그해의 추석은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비는 며칠 동안 계속 내렸고, 하늘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도로 위에는 낙엽이 젖어 붙었고, 강둑 근처의 풀들은 쓰러진 채로 멈춰 있었다. 사람들은 귀경길을 걱정했지만, 그것은 단지 현실적인 걱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끝내야 한다는 마음의 무게였다. 언제부턴가 명절은 만남보다 이별에 더 가까운 의식이 되어 있었다.



신문의 마지막 장에는 오래된 광고 하나가 남아 있었다. 흐릿하게 번진 글씨 속에서, ‘추석맞이 세일’이라는 문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활자들은 마치 사람들의 표정 같았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쳐 있었다. 활자의 번짐과 사람들의 피로가 서로 닮아 있었다. 삶은 그렇게 번져가는 활자와 같았다.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읽히지도 않는 상태.


그해의 추석은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렸고, 집집마다 남은 음식의 냄새가 골목을 따라 흘러나왔다. 젖은 신문지는 다시 접혀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사람들은 각자의 도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해의 기억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마치 읽을 수 없게 번진 한 줄의 기사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고, 명확하게 남지도 않은 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그날의 비, 젖은 신문, 흐릿한 얼굴들, 무겁게 감긴 공기. 그것들은 모두 어떤 관계의 단면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더는 말을 건넬 수 없는 사이, 너무 오래되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감정. 비에 젖은 신문을 살며시 펼쳐 보는 마음이란, 어쩌면 그런 관계를 다시 한번 더듬는 행위와 닮아 있다. 읽히지 않는 활자 속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찾으려는, 아주 느리고 조용한 애도의 형태.



그해의 추석은, 그 어떤 명절보다 오래된 문장처럼 남았다. 읽을 수 없지만 버릴 수 없는 문장. 그 문장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젖은 종이 위에 남은 흔적처럼, 지워지지 않은 채, 그러나 다시 쓰이지도 못한 채. 비는 그렇게 모든 것을 적시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맑아졌다. 하지만 그해의 추석만은 여전히 비에 젖은 조간신문처럼.



어딘가에서 조용히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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