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쓸 수 없다고 생각될 때.
⁶비는 오래전부터 모든 언어의 첫 문장이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무심하게 흘러내릴 때, 단어들은 저마다의 무게를 잃는다. 추석의 오후, 회색빛 하늘 아래 세상의 모든 문장은 침묵에 잠긴다.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차창에는 고속도로의 빗물이 세로로 흩어진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그 고요 속에서 언어는 한때 자신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을 잃는다. 설명은 이제 불가능하다. 단지 적셔질 뿐이다.
비 오는 명절의 도시는, 쓸 수 없는 문장들의 묘지 같다. 모든 간판이 젖어 흐릿하고, 사람들의 얼굴은 서로의 표정을 알아보지 못한 채 스쳐간다. 우산은 흑백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늘은 회색으로 모든 색을 동등하게 만든다. 문장은 그런 세계를 견디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그런 세계 속에서 소멸한다. 언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불가능을 증명하며 시작된다.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다.”
이 절망은 단순한 작가의 변명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가 스스로의 한계에 닿았을 때 터져 나오는 본능적인 고백이다. 인간이 언어로 세계를 건드리려 할 때, 언어는 자신이 그 세계를 닫아버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문장은 열기 위해 태어났지만, 닫는 역할을 수행한다. 단어 하나를 쓰는 순간, 그 단어는 수천 가지 가능성을 봉인한다. 그 제한된 선택 안에서 글쓰기는 언제나 패배로 시작한다.
비가 내릴 때의 공기는 어떤 문장보다 정확하다. 물의 냄새, 젖은 흙의 숨결, 가로등 아래 번지는 빛의 떨림. 그 모든 것은 말보다 앞선 감각이다. 인간은 그것을 포착하려 하지만, 감각은 종이 위에서 부패한다. ‘비가 내린다’는 말은 결코 비의 질감이 아니다. 그 문장은 오히려 비를 죽인다. 그래서 글을 쓰는 자는 늘 살인자다. 현실의 질감을 단어로 죽이고, 그 시체를 문학이라 부른다.
언어는 살아 있는 세계를 소유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그 과정에서 세상을 소멸시킨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의 절망은 인간이 언어의 폭력을 깨닫는 순간이다. 말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세상을 더 멀게 만든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비로소 글쓰기는 시작된다.
그 절망은 어쩌면 비슷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책상 앞에 앉아, 손끝에 연필을 쥐고, 아무 말도 적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간다. 머릿속은 가득하지만, 문장은 허공에 떠 있다. 생각은 짙고, 언어는 무겁다. ‘이건 아니다’라는 판단만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그러나 바로 그 반복 속에서 문장은 태어난다. 문장은 완성된 사고가 아니라 실패한 사고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글쓰기는 불완전함의 기록이다.
그 소리는 마음속 공백을 메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공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명절의 도시가 비로 젖을 때, 사람들은 서로를 떠올리지만, 그리움조차 언어로는 옮겨지지 않는다. 말로 표현된 그리움은 이미 절반쯤 사라진 그리움이다. 언어는 감정을 저장하지 못한다. 단지 그 부재를 표시할 뿐이다.
글쓰기는 언제나 결핍의 예술이다. 결핍이 사라지면 문장은 죽는다. 사랑이 완성되면 더 이상 편지는 쓰이지 않는다. 비가 그치면, 유리창 위의 흐름은 멈춘다. 인간은 완벽한 순간을 쓰지 못한다. 완벽은 언어의 적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그 감각이야말로 글쓰기의 진짜 문턱이다.
그 문턱에 선 자만이 안다. 언어의 문은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그 문은 안쪽에서만 열 수 있다.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내부의 공기와 외부의 공기가 섞이며, 둘 다 사라진다. 언어는 그 사라짐 속에서 존재한다. 쓰는 행위는 남기는 것이 아니라 지워나가는 일이다. 남는 것은 지워진 자리의 흔적뿐이다.
어떤 문장은 비처럼 흩어지고, 어떤 문장은 흙처럼 남는다. 비 오는 추석날의 공기 속에는 사라짐의 냄새가 있다. 도시의 모든 창문 뒤에서, 각자의 침묵이 한 문장씩 태어나지 못한 채 죽어간다. 그것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 언어의 유산이다. 그러나 그 유산이야말로 문학의 자궁이다. 언어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언어다.
쓸 수 없다는 감각이 지속될수록, 문장은 태어나려는 욕망을 품는다. 그 욕망은 본능처럼 고요하다. 손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쓰려는지도 모른 채 움직인다. 마치 아이가 어둠 속에서 손을 뻗는 것처럼. 그 손이 닿는 곳에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세계의 일부가 된다. 언어는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생성한다.
비는 그 세계의 첫 배경이다. 모든 시작은 젖어 있다. 종이의 섬유 속까지 스며드는 물처럼, 언어는 인간의 내면에 천천히 스며들어 간다. 말은 처음엔 단순한 소리였지만, 어느새 인간의 운명이 되었다. 쓰는 자는 언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다루어진다. 언어는 인간의 입을 통해 세계를 다시 발명한다. 그때, 비의 소리는 문장보다 앞서 존재한다. 그것은 문장 이전의 문장이다.
이제,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은 언제나 같다. 말들이 고갈되고, 문장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만 진짜 문장은 생겨난다. 글쓰기는 가능한 것의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탐지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절망은 출발점이다.
비가 멈추지 않는 오후, 창밖의 하늘은 여전히 무겁다. 이 계절의 명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사람들은 모여 있지만, 마음은 흩어져 있다. 식탁 위의 대화들은 과거의 회상으로 흘러가고, 살아 있는 말은 없다. 살아 있는 말은 언제나 불편하다. 그것은 누군가를 침묵하게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를 깨운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언어의 생명이다.
모든 글은 결국 하나의 침묵에서 시작한다. 그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감정의 무게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손이 움직이고, 단어가 찍힌다. 문장은 그 무게의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그 그림자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다시 쓴다. 쓰는 행위는 그 무게를 잠시 견디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될 때, 언어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 되돌아봄 속에서 문장은 태어난다. 그것은 언어의 부활이 아니라, 언어의 사후다. 이미 죽은 말이 다시 숨을 쉬는 일. 그래서 글쓰기는 살아 있는 자의 행위이면서, 동시에 죽은 언어에 대한 애도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그 빗속에서 단어들은 천천히 젖는다. 그리고 젖은 단어들은 언젠가 다시 마를 것이다. 마른자리에는 새로운 언어의 씨앗이 남는다. 그 씨앗은 아직 이름이 없다. 그것이 바로.
글이 시작되는 자리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