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우울해지려고 태어나는 거야

저토록 즐거운 걸 봐.

by 적적

그곳에 어둠은 그쳤나요? 아직 그쳐가는 중인가요? 창가에 빗방울이 멈춰있어요. 바람도 잠시 불지 않고 그래도 가로수 끝으로 바람이 부는지 나뭇잎들은 파도처럼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고 있습니다.


길가로 나서자 우산을 이제 펼쳐 쓰는 사람과 택시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려다 다시 접는 사람 그리고 비를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비를 맞는 사람 역할을 맡아 가만히 사람들을 바라다봅니다. 아무 표정도 없이 길을 걷습니다. 그는 아직 이런 날의 표정을 정하지 못했어요

언젠가 이렇게 비를 맞은 날이 있었죠. 아마도 그날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관계라는 건 시계 속 작은 톱니 같은 거라는 걸요. 서로 몸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맞물려가며 서로 마주치면 어디 있는지 모를 톱니들이 그리고 어디서부터 전달되는지 모를 무언가 풀려가고 있다는, 감겨있던 힘이 아주 미세하게 풀려가고 있다는 느낌, 운명 그래요. 진동 진동에 가까운 거라면 제일 근접한 표현이겠군요.


그의 아버지가 제일 처음 사주신 시계가 그랬어요. 아침이면 시계를 차기 전 작은 나사를 돌려 태엽을 감아주었죠. 손끝으로 무언가 팽팽히 감기는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졌죠. 더 이상 감을 수 없다는 건 그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어요. 모든 태엽은 모두 다른 한계치를 지녔으며 하루 동안 일용할 양식을 아주 균일한 힘으로 풀어내고 있었죠.


그녀와 나는 너무나 격하게 맞물려 돌고 있었어요. 서로의 끝이 조금씩 마모될 정도로 서로를 깎아내리고 있었죠. 처음엔 깎여진 끝이 헐거워지더니 서로의 위치가 조금씩 헛돌고 있는 것처럼 다음 톱니를 그다음 톱니를 마모시켰어요. 모든 톱니가 조금씩 마모되며 우린 톱니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끝이 사라져 갔어요.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비가 멈추지 않은 아침이었으며 그의 새로 산 신발 끈은 묶어놓은 자리가 덧없이 풀리며 빗물을 잔뜩 마시고 걸음을 걸을 때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점점 더 부풀어 올랐어요. 몇 번을 더 묶기만 하던 그가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게 맞는 일인지 묻기도 했었어요. 그건 맞고 틀리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만 마모되었던 거란 것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였어요.


풀려버린 신발 끈은 신발을 물들게 했어요. 그녀를 만날 때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젖은 양말 속에서 뽀득거리는 발가락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녀와 그는 서로 손을 맞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가 먼저 잡고 있던 한쪽 손을 놓는 말을 하고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놓자 그 조용하고 검은 공간에서 천천히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볼 수 있었죠.


그녀와 그는 중력이 사라지고 있어요. 멀리 사라졌다가 비가 오는 날이면 부딪히지 않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곤 하죠. 그녀가 부서지는 얼음 알갱이를 늘어뜨린 기억의 꼬리가 보이거든요.

바라다보면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어쩌면 서로의 손을 놓았던 마지막 순간의 예의죠.


그는 그 순간을 낭만이라고 하죠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올 테니까..


살아남는 건 추억을 지키려는 의지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