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 수십 번의 심장으로 구성된 하루
벌새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벌새를 키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죠.
이 문장은 이상하게도 욕망의 형태라기보다는 정체성에 더 가까웠어요. 어떤 생명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벌새와 비슷한 속도의 세계를 한 번쯤 통과해 본 사람 말이죠.
새끼손톱보다 작은 심장이 초당 수십 번씩 공기를 두드리며 피를 밀어내는 생명체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상상은, 곧 생활의 균형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으로 이어졌어요. 방 안의 공기가 달라지고, 시간이 갑자기 촘촘해지고, 하루가 더 이상 늘어지지 않을 것 같았죠. 벌새는 정지해 있는 걸 견디지 못하거든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벌새는 이미 이 방, 이 의자, 이 느린 오후와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어요.
벌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색이 생각나요.
색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물감처럼 고정된 건 아니죠. 차라리 빛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에 더 가까워요.
녹색이면서도 초록이라고 말하기엔 어딘가 어긋나 있고, 붉은 기운이 스치지만 피의 온도는 남기지 않죠.
각도에 따라 색은 갑자기 말을 바꿔요.
방금 전까지는 같은 언어를 쓰던 세계가, 고개를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전혀 다른 문법으로 응답하는 것처럼요. 벌새의 목깃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시험하는 것 같아요. 지금 보고 있는 게 실제인지, 아니면 눈이 만들어낸 임시적인 합의인지 묻는 것처럼 말이죠. 그 색은 늘 오후 네 시쯤의 햇빛을 닮아 있어요.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안도와, 곧 기울 거라는 불안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의 빛이죠. 벌새의 날갯짓 소리를 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어요. 대신 상상 속에서는 늘 미세한 전동기 소리에 가까웠죠.
감정이 제거된 소리, 기능만 남은 소리요.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소리라기보다는, 살아 있어야만 가능한 진동에 가까운.. 공기를 가르며 생존을 유지하는 소리죠. 벌새는 날갯짓을 멈추는 순간 추락해요. 멈춤이 곧 실패가 되는 생명체죠.
쉬지 않기 위해 태어난 구조예요. 인간은 쉬기 위해 의자를 만들고 침대를 발명해 왔는데, 어떤 생명은 쉬지 않기 위해 근육과 심장을 그렇게까지 설계받았다는 사실이 좀 불편하게 다가와요.
설명이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까운 불편함이죠. 벌새에게는 집이 필요 없어요. 적어도 인간이 이해하는 의미의 집은요. 머무름, 축적, 귀환 같은 개념이 벌새에게는 너무 무거워 보여요.
사육장을 상상해 본 적도 있죠.
그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투명한 유리벽 안에서 벌새가 계속 날갯짓을 하고 있는 장면은, 지나치게 선명한 잔인함을 품고 있었거든요. 출구 없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사람처럼요. 도망칠 수 없는 속도 안에 갇힌 생명 말이죠.
투명함은 언제나 자유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가장 완벽한 감옥이 되기도 하죠.
벌새의 먹이는 단순해요. 설탕물, 꽃의 꿀이죠. 그런데 그 단순함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계산 위에 놓여 있어요. 농도가 조금만 달라도, 온도가 미세하게 어긋나도 벌새는 거부해요. 하루에도 수십 번 먹이를 섭취하지 않으면 몸은 곧 연료 부족을 드러내죠. 작은 부리를 꽃의 중심에 정확히 집어넣는 동작을 보고 있으면, 맞지 않는 열쇠를 끝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돌려보는 손놀림이 떠올라요.
생존이 이렇게까지 섬세한 기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손끝에 설명하기 어려운 간지러움이 남아요.
벌새를 키운다는 건 어쩌면 시간을 키운다는 뜻일지도 몰라요. 벌새의 하루는 인간의 하루와 같은 단위로 측정되지 않거든요. 그들의 삶은 몇 초 단위로 생과 사를 왕복해요.
잠을 자는 순간조차 완전히 멈추지 않죠. 체온을 낮추고, 심장 박동을 최소한으로 줄여 겨우 생을 붙들어 매요. 그건 휴식이라기보다는 긴급 모드에 더 가까워요. 그런 잠을 인간은 견딜 수 있을까요.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는 감각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 말이에요.
벌새는 방향 감각이 탁월해요.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고도 정확히 돌아오죠. 이전에 피었던 꽃의 위치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시 사용해요. 벌새에게 기억은 추억이 아니라 도구예요. 장식이 아니라 기능이죠.
꿀이 있었던 자리, 위험이 숨어 있던 방향. 필요한 정보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려요.
인간의 기억은 종종 감정과 엉켜서 무게를 갖게 되죠. 사소한 장면 하나가 불필요한 후회를 데려오고, 이미 끝난 일들이 현재의 발걸음을 늦춰요. 벌새의 기억은 가벼워요. 그래서 정확하죠.
벌새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던 날들은 대체로 삶이 지나치게 느리게 흘러가던 시기였어요. 하루가 너무 길고, 시간의 모서리가 무뎌질 때요. 아무리 집중해도 속도가 나지 않고, 생각만 공회전하던 날들이죠.
그럴 때면 벌새의 심박수를 떠올렸어요.
초당 수십 번 뛰는 심장 말이에요. 그 리듬이 몸 안으로 옮겨와서 망설임과 주저를 밀어내 주길 바랐죠.
생각보다 강한 생명력은 언제나 매혹적이에요. 어딘가 구원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동시에 벌새는 극단적으로 연약해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무게죠.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나 작은 충돌 하나에도 쉽게 생을 놓아요. 강렬한 속도와 극단적인 취약성. 이 모순은 인간의 삶과도 닮아 있어요. 스스로를 단단하다고 믿는 순간에도,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에 금이 가죠. 벌새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아요.
방어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죠.
그저 날아다닐 뿐이에요.
벌새를 키운다는 상상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하나의 장면에 도달해요. 어느 날 창문이 열려 있고, 벌새는 그 틈을 발견하죠. 망설임은 없어요. 속도는 언제나 결정을 대신하거든요. 손을 뻗지 않아요.
붙잡지도 않죠.
작은 등이 점처럼 멀어질 때까지 바라볼 뿐이에요.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잠시 같은 공기를 나누었을 뿐이었다는 깨달음. 그건 이상하게도 상실이 아니라 충분함으로 다가와요.
벌새를 키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아마도 벌새를 키울 수 없는 사람이겠죠. 너무 빠른 생명 앞에서 인간은 늘 뒤처지니까요. 그리고 뒤처진 존재는 결국 소유하려 들죠.
그 사실을 알아차린 이후로 벌새는 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요. 대신 아주 가끔, 색채만 남기고 지나가요.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지는 방식으로요.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빛처럼요.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