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 그다음 날의 방식
어떤 날은 다음날을 생각하게 되죠. 그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일의 온기에 더 가까워요. 공기 속에 남아 있다가 서서히 식어가는 감각 같은 거죠. 그래서 도시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처럼 움직이기 시작해요. 깨어난다기보다 잠과 각성 사이에 몸을 두고, 창문 너머의 빛을 오래 바라보다가 뒤늦게 하루에 참여하는 식으로요.
밤새 얼었다 풀리기를 반복한 성에는 투명한 금이 퍼져 있어요. 그 틈으로 흘러내린 물방울은 유리 위에 짧은 자국만 남기고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사라지죠. 전날 밤 과장되게 반짝이던 전구들은 낮의 빛 앞에서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해요.
켜져 있지만 이미 꺼진 것처럼 보이거나, 꺼져 있지만 방금 전까지의 열을 아직 품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공기는 어제와 같은 온도와 밀도를 지니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안에서 다른 냄새를 맡았다고 말하죠. 다른 계절이 시작됐다고 믿고 싶어 하고요. 그 믿음이 하루의 속도를 아주 조금 늦춰요.
거리에는 접힌 종이 포장지가 새벽의 습기를 머금은 채 쓰레기봉투 옆에 기대어 있어요. 그 종이는 더 이상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죠. 접힌 자국과 구겨진 모서리만으로 한때 필요했던 사물이었음을 주장해요. 붉은 리본은 묶일 대상 없이 풀어진 채 바람에 끌려가다 멈추기를 반복하죠. 약속되지 않은 시간처럼 바닥을 스쳐요.
전날 밤 유리창을 통해 흘러나오던 캐럴은 사라지고, 청소차의 후진 경고음이 골목의 벽과 벽 사이를 왕복하며 공간을 천천히 비워내요. 그 소리는 질문도 예고도 없이 도착해서 축제가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만을 남겨요. 사람들은 그 반복되는 소리를 들으며 기대라는 것이 얼마나 조용히 계산에서 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죠.
카페의 유리문에는 눈송이 스티커가 아직 붙어 있어요. 이제는 계절의 은유라기보다 아직 제거되지 않은 장식물에 가까워요. 바리스타는 산타 모자를 벗고 검은 앞치마를 두르죠. 익숙한 동작으로 컵을 예열하고 주문을 받아요.
커피 머신은 축제 동안 허락되었던 느린 리듬을 거둬들이고, 일정한 간격으로 증기를 뿜으며 시간을 다시 생산해요. 주문대 앞에 선 얼굴들에는 선물도 약속도 없죠. 아직 일정이 되지 못한 빈 시간들이 유리처럼 얇게 비쳐요. 사람들은 그 빈칸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요. ‘다음’이라는 말을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접어두고 아직 펼치지 않은 페이지처럼 다뤄요.
어떤 날은 그렇게 다음날이 떠오르죠. 아직 겪지 않은 실패와 아직 오지 않은 기쁨이 같은 무게로 상상 속에 놓여요. 서로를 밀어내지도 끌어당기지도 못한 채 흔들리죠.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은 그 불안정한 균형을 아무 표정 없이 반사해요.
층수 버튼의 불빛은 하나씩 켜졌다 꺼지며 시간이 이동 가능한 층위를 가졌다는 착각을 만들죠. 사람들은 실제로 누른 층보다 더 먼 곳을 아직 도달하지 않은 삶의 구간처럼 생각해요. 마음은 그만큼 가벼워지지만, 그 가벼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묻지 않아요. 잠시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머물 뿐이죠.
집 안에는 전날 끝내 풀지 못한 상자가 남아 있어요. 상자 안의 물건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오래된 감촉을 가져요. 비닐을 벗길 때 나는 소리는 기대보다 훨씬 얇게 흩어지죠. 설명서는 여러 언어로 같은 문장을 반복해요.
아직 오지 않은 사용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문제를 가정하죠. 사람들은 그 문장들 사이에서 미래가 이미 조건문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그러나 분명하게 느껴요. 아직 아무것도 고장 나지 않았는데 고장의 가능성은 종이 위에서 이미 숨을 쉬고 있어요.
해가 기울 무렵이 되면 하늘은 전날보다 더 일찍 어두워져요. 노을은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인사처럼 짧게 지나가죠. 구름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고 하루가 다시 해체되고 있다는 인상을 남겨요. 창가에 선 사람들은 그 장면을 붙잡지 않아요. 이미 본 적이 있거나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속에서 색을 다음 장면으로 넘겨요. 그렇게 흘려보낸 풍경들이 쌓여 아직 보이지 않는 내일의 윤곽을 천천히 만들죠.
핸드폰 화면에는 읽히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 남아 있어요. 축하와 안부의 문장들은 시간을 지나며 서로를 닮아가다가 결국 거의 같은 형태로 수렴하죠. 답장이 없는 이유는 피로 때문이 아니에요. 어떤 말을 미래에 맡겨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말은 언제나 다음을 요구하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잠시 침묵을 선택해요. 그 침묵은 거절도 무례도 아니에요.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감정이 잠시 머무는 자리죠.
잠자리에 들기 전 불을 끄는 손끝은 어제보다 조금 느려요. 방 안에는 포장지의 반짝임 대신 벽지의 미세한 균열과 가구 위에 내려앉은 먼지의 윤곽이 드러나죠. 전날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내일이라는 하루의 바탕이 돼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기보다 조용히 받아들이는 쪽을 택하죠.
결국 어떤 날은 다음날을 생각하게 되죠. 희망도 절망도 아니에요. 남아 있는 시간의 온도와 질감에 대한 감각에 가까워요. 크리스마스 다음날처럼 이미 끝난 것과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 사이에서 사람들은 잠시 서 있다가 다시 움직여요. 내일은 오늘보다 덜 반짝이겠지만 조금 더 단단할 거라고, 그래서 오래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요. 말로 만들지 않은 채 가만히 짐작하게 돼요.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