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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이브를 연습한다

언젠가부터 비슷하게 시작되는 하루에 대하여

by 적적

도시의 크리스마스이브는요, 늘 비슷하게 시작되죠. 마치 리허설이라도 해본 것처럼요. 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기면 해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사람처럼 서둘러 기울어요. 건물 유리창마다 불이 하나씩 켜지고, 길은 그제야 저녁이 됐다는 걸 인정하죠. 상점들은 전구를 더 밝히고요, 트리에 매단 장식들은 낮에는 별 볼 일 없던 얼굴을 갑자기 드러내요.


특히 빵집 앞을 지나갈 때가 문제예요. 버터랑 설탕이 섞인 냄새가요, 그게 생각보다 잔인하거든요. 그냥 지나가질 못하게 하더군요. 발걸음이 괜히 느려지고, 이미 손은 문 손잡이를 잡고 있죠. 문을 열면 종이 울리고, 케이크들은 전부 눈을 맞은 척 가만히 서 있어요.



크리스마스이브라는 말은 좀 이상해요. 오늘만 가리키는 말 같지는 않거든요. 예전에 있었던 이브들이 슬쩍 끼어들어요.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캐럴도 마찬가지죠. 노래는 해마다 바뀌는 것 같은데, 듣고 있으면 결국 비슷해요.


박자도, 분위기도요. 사람들은 그런 반복 속에서 괜히 자기 인생을 점검하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신호가 바뀌는 순간, 다들 동시에 숨을 쉬어요. 하얀 숨이 한꺼번에 퍼지는데, 그게 또 금방 사라지죠. 근데 이상하게 그 장면은 오래 남아요. 별것도 아닌데요.



카페 안은요, 바깥이랑 시간이 달라요. 아예 다른 나라 같죠. 창가 자리는 이미 예약됐고, 컵받침 위에는 누군가 남기고 간 물자국이 있어요. 그 자국이 괜히 오래된 흔적처럼 보이더군요. 커피 향이 공기에 퍼지면 사람들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낮아져요. 다들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요.



연인들은 메뉴판은 대충 보고 서로 얼굴을 봐요. 조명이 피부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니까요. 웃음은 조금 과해지고, 말 없는 시간은 괜히 의미 있어 보이죠. 테이블 아래에서는 발끝이 살짝 닿았다가, 또 떨어져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요.


이브에 같이 보내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는 순간은요, 거창하지 않아요. 정말 별것 아닌 데서 시작돼요. 지하철에서 계단에서 스치는 향수냄새라든지, 휴대전화 화면에 잠깐 스친 이름 같은 거요. 알림은 없는데도 괜히 화면을 오래 보게 되죠.



얼굴은 푸른빛에 잠기고, 손가락은 멈춰 있어요. 뭔가 쓰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결국 안 써요. 머릿속에서는 문장이 완벽한데요. 막상 보내려고 하면 다 지워지죠. 그런 문장들은 대개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쪽으로 끝나요.



집에 들어오면 조명이 참 솔직해요. 거리 불빛처럼 사람을 예쁘게 만들어주진 않죠. 천장등은 그림자도 숨기지 않고, 테이블 위 먼지도 그대로 보여줘요. 창밖에서는 차 소리가 들리고,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마다 쇳소리가 나요.


냉장고 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리죠. 남은 음식들은 각자 다른 용기에 들어 있고요, 그걸 보면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있구나 싶어요. 접시 하나 꺼내는 것도 괜히 조심스럽고,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도 크게 들려요. 혼자 먹는 밥은 원래 그렇죠. 조용한데 시끄러워요.



창가에 서면 도시가 보여요. 다들 각자 자기 창 안에서 살고 있죠. 커튼 색도 다르고, 텔레비전 화면도 다르고요. 누군가는 소파에 누워 있고, 누군가는 아직 식탁에 앉아 있어요. 그 장면들이 다 말없이 흘러가는데, 그게 또 하나의 공연 같더군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대는, 아마 이런 데서 생기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평범함 중에 하나쯤은 예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요.



밤이 되면 소음은 줄어들어요. 대신 발자국 소리가 커지죠. 젖은 낙엽이 신발에 붙었다가 떨어지고요. 편의점 앞에서는 종이컵 커피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있어요. 컵에서 김이 올라오면, 그 사람 얼굴이 잠깐 사라져요.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눈을 살짝 감죠. 뜨겁고 달고, 이상하게 위로가 돼요. 그 순간에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해요. 같이 마셨으면 좋았겠다는, 너무 뻔한 생각이요. 근데 이브에는 그런 생각이 좀 허용되더군요.



결국 크리스마스이브는 질문으로 끝나요. 같이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하고요. 대답은 늘 애매해요. 떠오르긴 하는데 연락하진 않고,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가도 마음이 편하진 않죠. 질문만 남아요. 불 끄고 누우면 방은 어둡지만 완전히 어둡진 않아요. 가로등 불빛이 커튼 사이로 들어와서 벽에 선을 하나 그려요. 그걸 보고 있다가 잠들죠. 그리고 다음 날이 와요.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을 가진.



생각보다 평범한 하루가요.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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