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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몸이 멈추는 방식

온도는 낮고, 표면은 단단해지고.

by 적적


경기장은 그냥 기능으로만 있어요. 좌석이 몇 개인지, 통로가 얼마나 넓은지, 출입구가 어디 있는지 다 정해져 있죠. 거의 안 바뀌고요. 관중이 적다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에요. 규격을 벗어날 때만 문제가 되죠. 이 공간은 그렇게 작동해요.


선수는 정해진 시간에 와요. 정해진 순서로 몸을 풀죠. 스트레칭하고, 숨 고르고, 장비를 확인해요. 왜 그런지는 굳이 묻지 않아요. 몸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글 쓰는 자리도 비슷하더군요. 책상은 늘 그 정도 크기고요. 모니터는 항상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요. 키보드는 오래된 배열 그대로고요. 의자는 아주 편하지도, 그렇다고 불편하지도 않게 맞춰져 있죠. 글 쓰는 데 특별한 조건은 필요 없어요. 필요한 건 규격이에요. 문단 길이, 문장 호흡, 어디서 지울지 같은 거요. 설명 안 해도 계속 반복돼요.



선수 유니폼도 그래요. 기능적이죠. 땀을 잘 빨아들이고, 마찰도 줄여주고요. 색은 튀지 않고, 로고는 작아요. 유니폼이 의미를 가질 때는 거의 없어요. 빨래를 계속하면 얇아지고요. 얇아지면 몸이 드러나죠. 표현이라기보단 결과예요. 그냥 그렇게 된 거죠.

문장도 마찬가지예요. 여러 번 고쳐진 문장은 점점 얇아져요. 형용사 빠지고, 부사 없어지고요. 남은 단어들은 서로 건드리지 않아요. 의미를 보여주려 하지도 않죠. 자기 역할만 해요. 잘 읽히는 문장은 의도보다 결과에 가까워요.



훈련은 새벽에 시작해요. 체육관은 조용하고, 바닥은 차갑죠. 테이프 자국 남아 있는 자리도 늘 비슷해요. 선수는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해요. 각도도 거의 안 바뀌죠. 그게 중요해요. 기록이 바뀌는 날은 드물어요. 그래도 반복은 멈추지 않아요.

글 쓰기도 그래요. 각도가 중요하죠. 문단을 어디서 시작할지, 문장을 어디서 끊을지, 단락 사이를 얼마나 띄울지요. 대부분은 결과를 안 바꿔요. 그런데 가끔은 바뀌죠. 그날이 언제인지는 몰라요. 그래서 같은 각도를 유지해요. 반복은 감정이 아니에요. 구조죠. 구조는 반드시 흔적을 남기더군요.



경기는 조용히 시작해서 조용히 끝나요. 사회자 목소리는 평평하고요. 관중 반응은 들쑥날쑥하죠. 선수는 숨만 조절해요. 긴장은 잘 안 보여요. 이미 몸 안에 들어간 동작만 남아 있어요.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그 자리에서 바로 판가름 나지 않아요.

문장도 바로 평가받지 않아요. 첫 문장에 박수치는 사람 없죠. 문단이 독자를 설득하려 들지도 않아요. 그냥 다음 문단 놓일 자리만 만들어요. 글은 계속 가지만, 고조되지는 않아요. 독자가 끝까지 안 읽을 수도 있어요. 그 가능성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아요.



패배는 기록으로 남지 않아요. 인터뷰도 없고요. 선수는 장비 정리해요. 테이프 떼고, 신발 가방에 넣죠. 땀이 마르면서 천이 굳어요. 구겨진 상태 그대로예요. 펴지지 않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그렇게 남아 있어요.

지워진 문장도 비슷해요. 한때는 꼭 필요했고,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문장들이죠. 삭제 누르면 화면에서는 사라져요. 그래도 완전히 없어지진 않더군요. 이전 버전에 남거나, 기억에 남거나, 다음 문장 말투에 묻어나요. 안 쓰는 것도 하나의 상태예요.



비인기종목 시간은 늘어져요. 대회 사이 간격이 길고요. 그 사이에 달라지는 건 거의 없죠. 선수는 체중 유지하고, 몸 상태만 봐요. 관리 대상은 항상 미래예요. 지금 상태는 다음 상태를 위한 준비일 뿐이죠.

글 쓰는 시간도 비슷해요. 원고는 발표 안 된 채 오래 있어요. 수정은 계속되는데 공개는 미뤄지죠. 기다림을 잘 활용하는 것도 아니에요. 관리한다고 할 수도 없고요. 그냥 기록해요. 이 문장이 왜 여기서 더 못 가는지, 이 문단이 왜 멈췄는지요.


부상은 설명 안 해요. 아픈 건 개인 문제죠. 선수는 동작을 줄이거나 각도를 살짝 바꿔요. 그 변화는 밖에서 잘 안 보여요. 설명 안 하는 게 더 정확할 때도 있더군요.

글에서도 막히는 건 설명 안 해요. 어떤 문단은 그냥 거기서 멈춰요. 이유를 붙일 수는 있지만, 굳이 안 붙여요. 대신 다른 문단 옆에 둬요. 잘 가는 문단이랑 멈춘 문단이 나란히 있어요. 독자는 그 사이를 그냥 지나가죠.



관중석엔 몇 사람 앉아 있어요. 박수는 들쭉날쭉하고요. 선수는 그쪽을 안 봐요. 보는 순간 동작이 망가질 수 있거든요. 집중이라는 건 뭘 더 보는 게 아니라, 덜 보는 쪽에 가까워요.

글 쓰는 사람도 독자를 잘 상정하지 않아요. 특정 반응을 기대 안 하죠. 문장이 누군가한테 닿을 수도 있고, 안 닿을 수도 있어요. 도달이 목표는 아니에요. 유지가 더 가까워요.



시즌 끝나면 숫자만 남아요. 순위, 기록, 수입 같은 것들이죠. 다음 시즌은 불확실해요. 선수는 장비를 닦고 정리해요. 다시 쓸지 모르는 물건을 똑같은 방식으로 놓죠.

글 쓰는 사람은 파일 저장해요. 날짜랑 버전이 이름에 남죠. 다시 열 확률은 높지 않아요. 그래도 지우진 않아요. 남겨두는 것도 선택이니까요.



비인기종목 선수로 산다는 건 중심이 안 되는 기술을 익히는 일이에요. 글 쓰는 것도 비슷하죠. 튀지 않는 문장, 결론을 미루는 구조, 설명이 빠진 단락들. 주목받지 않는 방식으로 계속되는 상태요.

마지막은 정리 안 해요. 체육관에 불이 꺼지고요. 바닥에 남은 테이프 자국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여요. 선수는 더 이상 안 움직여요. 글 쓰는 사람도 마지막 문단은 덧붙이지 않아요. 결론도 안 쓰고, 여운도 일부러 만들지 않죠. 그냥 여기까지 왔다는 상태만 남겨요. 온도는 낮고, 표면은 단단해요. 더는 안 바뀌지만,


사라지지도 않아요.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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