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는 겨울이면 오히려
따스해지죠. 겨울은 늘 그런 식이에요. 초라한 것들부터 먼저 드러나요. 나뭇가지의 관절이라든가, 벗겨진 보도의 모서리, 닫힌 상점 유리문에 붙은 오래된 임대 문의 종이 같은 것들이요. 여름에는 그냥 배경으로 밀려나 있던 것들인데, 겨울이 오면 갑자기 전면으로 나와요. 눈이 오지 않은 날이면 더 그렇죠. 흰색이 덮어주지 않으면, 세계는 숨는 법을 잊어버리거든요.
그날도 그랬어요. 공기는 맑았지만 투명하지는 않았고, 차가웠지만 날카롭지는 않았죠. 손에 쥔 열쇠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그걸 쥔 손은 이유도 없이 오래 멈춰 있었어요. 아침 골목은 유난히 소리가 작았죠. 차가 지나가는데도, 바퀴와 아스팔트 사이에서 나야 할 소리가 끝까지 나지 않았어요. 중간에서 포기해 버리는 느낌이랄까.
모든 소리가 그쯤에서 돌아가는 것 같았죠. 쓰레기봉투 옆에 손잡이가 깨진 우산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살을 다 드러낸 채로요. 우산살은 한 방향으로만 휘어 있었고,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더군요. 우산은 버려졌다는 사실보다도, 버려질 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초라해 보였어요.
건물 1층 난방은 늘 과하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겨울은 단번에 밀려났다가는, 다시 아주 천천히 발목부터 돌아와요. 유리문 안쪽에는 김이 맺히고, 손바닥을 대면 흔적이 남죠. 몇 초 뒤면 사라지지만, 사라지는 순서는 늘 같아요. 가장자리가 먼저 옅어지고, 중심이 마지막까지 남아요. 이별도 대개 그렇더군요. 중심은 늘 제일 늦게 식어요. 카운터 위에는 플라스틱 컵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종이 슬리브가 끼워져 있었고,‘뜨거움 주의’라는 문구가 보였죠. 그런데 겨울에는 그 말이 잘 안 와닿아요.
조심해야 할 건 뜨거움이 아니라,
금방 식어버린다는 사실이니까요.
컵 옆에는 장갑 한 짝이 놓여 있었어요.
손님이 두고 간 거겠죠. 다른 한 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요.
잃어버린 물건은 늘 이렇게 한 쌍 중 하나만 남겨요. 남은 쪽은 기다리지도 않고, 찾으러 가지도 않죠. 그냥 거기 그대로 있어요.
창가에 앉아 있으면 거리 사람들이 다 같은 속도로 지나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보면 다들 다른 겨울을 입고 있죠.
목도리를 너무 꽉 감아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사람도 있고, 지퍼를 끝까지 올리지 못한 채
걷는 사람도 있어요.
닫히지 않은 지퍼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는 얇고 정확하더군요. 추위라기보다는, 계속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느낌에 가까웠어요.
닫지 못한 건 추위를 부르고,
닫지 않은 건 기억을 부르죠.
정류장 전광판은 지연 시간을 계속 반복해서 보여줬어요. 숫자는 안 바뀌는데, 기다리는 얼굴은 계속 바뀌더군요. 어떤 얼굴은 포기했고, 어떤 얼굴은 아직 기대하고 있었죠.
그 기대는 버스라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더 가까워 보였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정류장 지붕 위 얇은 철판이 떨렸고요. 그건 잠깐 울리는 소리라기보다, 멈추지 않는 상태에 가까웠어요. 끝까지 남는 건 소리보다 떨림이더군요.
해 지는 시간은 정말 짧았어요. 오후와 저녁 사이에 거의 경계가 없었죠. 불이 켜진 창문들 사이로,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어요. 어둠은 그 집들을 특별하게 만들지는 않았죠. 다만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인상만 남겼어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는
늘 초라해 보이거든요.
그런데 그 초라는 잘 깨지지 않아요. 생각보다 단단하더군요. 준비가 안 됐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버티는 것 같았어요. 엘리베이터 안 거울은 사람을 똑바로 비추지 않죠. 살짝 위를 보고 있어서, 얼굴보다 이마가 먼저 보여요. 표정은 늘 그다음이고요. 표정은 항상 늦게 도착하죠. 거울 속 표정은 지나간 생각을 뒤쫓아오는 것처럼 보였어요.
문이 닫히는 동안 모습이 잠깐 여러 겹으로 겹쳤다가, 이내 하나로 정리됐고요.
그 짧은 혼란 속에서는 뭐가 본래였는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어요.
집 안은 조용했죠. 아무 소리도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들리는 소리들이 더 이상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쪽에 가까웠죠.
냉장고의 낮은 진동, 배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창틀을 스치는 바람까지. 다 아는 소리들이잖아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은 감정을 건드리지 않죠. 대신 흔적을 남겨요.
바닥에 놓인 오래된 노트는 구겨진 채로 있었고, 그 구김은 끝내 펴지지 않았어요. 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창밖에는 눈이 오지 않았어요.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늘 뭔가를 미완으로 남겨요. 하얗게 덮이지 않은 세계는 끝까지 정리되지 않죠. 전선 위에 앉은 새는 몸을 잔뜩 부풀린 채 움직이지 않았어요.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머문다는 뜻이라기보다, 에너지를 아끼고 있다는 쪽에 더 가깝더군요. 깨질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대개 이렇게 버텨요.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고,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서요. 밤이 깊어질수록 온도는 더 내려갔죠.
그런데도 추위는 더 이상 새로운 얘기를 해주지 않았어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거든요.
손잡이에 남은 체온, 컵 바닥의 물자국, 벽에 걸린 시계의 일정한 초침까지.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어요. 제자리에 있다는 건 안도라기보다는 그냥 상태에 가까웠죠.
무너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더 단단해지지도 않은 상태요.
초라는 그래서 쉽게 깨지지 않아요. 부서질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날의 겨울은 그렇게 남아 있었어요. 슬픔은 감정으로 닫히지 않고, 사라지지 않은 흔적처럼 계속 반복됐죠.
뭐가 끝났는지는 알 수 없었고, 뭐가 이어지는지도 분명하지 않았어요. 다만 세계는 여전히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특별한 이유 없이 유지되고 있었죠. 그건 결론이 아니라, 아직 변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