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말, 조용한 압력에 관한 기록.
겨울 되면 공기가 참 단단해지죠. 거리 온도는 영하로 떨어졌는데도, 사람들 숨이 뿌연 김처럼 떠올랐다가 조용히 부서지는 모습은 이상하게 익숙하더라고요. 그 작은 흩어짐이 겨울의 박동 같았어요. 손등 위에 내려앉은 눈도 금방 녹아 사라지는 줄 알았더니, 사라진 자리엔 차가운 감각 하나만 남더라고요. 겨울은 늘 그래요. 완전히 사라지는 건 없다는 걸, 별말 없이 알려줘요.
카페 창가에 앉아 있으면 그런 게 더 잘 보여요. 누가 마시다 만 커피엔 얇은 막이 생기고, 식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데, 그 위에 남은 흔적이 말보다 솔직하게 보일 때가 있죠. 자리 뜨고 간 사람이 남긴 냅킨에 접힌 자국, 구겨진 각도, 작은 얼룩. 그런 것만 봐도 어떤 말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눌린 채 남았구나 싶어지거든요. 사람 사이 말의 온도도 커피처럼 금방 식나 싶다가도, 또 침묵이 의외로 오래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뭐가 더 오래 남는 건지는 늘 애매해요.
거리 한쪽에 있는 작은 플라스틱 안내판이 바람에 삐걱거리며 흔들릴 때 있죠. 그 소리 들으면 겨울이란 계절이 사람만 잠식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도시의 약한 부분부터 먼저 흔들어놓는 것 같아요. 땅이 얼어붙으면 기둥이 미세하게 틀어지듯 마음도 방향을 잃을 때가 있고요. 균형이란 게 항상 위험한 경계 위에 있다는 게 느껴지죠. 흔들리는 것만 흔적을 남기니까요.
하임리히법이라는 것도 참 묘해요. 누군가 숨을 잃어갈 때, 말도 없이 뒤에서 팔을 감아올려붙이는 그 동작. 한순간에 사람 사이 거리까지 없애버리죠. 겨울엔 자꾸 그 동작이 떠오르는 이유가 있어요.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목도 잘 잠기고, 사람 마음의 단단함도 좀 약해지잖아요. 관계라는 것도 얼음판 걷는 것처럼 삐걱거리고요. 그 위태로움이 꼭 어디 걸려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도서관에 가면 공기가 더 정직해요. 난방기에서 나오는 오래된 숨소리 같은 진동이 있고, 책장 사이 빛줄기 속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설원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책을 한 권 뽑는 순간 그 설원이 흐트러지고요. 책갈피에 남은 누런 자국은 오래전 누군가 손끝이 닿았던 자리죠. 설명도 필요 없어요.
시간이라는 게 이런 형태로 남는구나 싶어져요. 오래 머문 자리는 다 그런 힘이 있죠. 마치 목구멍 어딘가에 오래 남은 말이 작은 압력만 받아도 올라오는 것처럼요.
지하철 타면 유난히 문장들이 많아요. ‘비상시에는 망치를 사용하십시오.’ ‘몸을 기대지 마십시오.’ ‘닫히는 문에 유의하십시오.’ 이런 문장들은 너무 물리적인데, 또 묘하게 마음에 걸릴 때가 있어요. 겨울 지하철은 사람 체온이 뒤엉키고, 좁은 통로에서 어깨 스치기라도 하면 작은 충격이 남거든요. 충돌이 흔적이 되고, 그게 때로는 하나의 계기로 남기도 하죠. 몸이 먼저 기억하는 경험들이 있어요. 말보다 선명한 것들요.
약국 앞 기침약 광고도 어쩐지 겨울에 더 크게 보이죠. 목을 눌렀다가 파악, 밀어 올려서 시원해지는 그 이미지. 현실에서는 대부분 그런 순간이 급박하고 위험한 건데, 광고는 늘 쉽게 해결되는 것처럼 보여줘요. 겨울은 원래 그런가 봐요. 불편한 것과 위급한 것의 경계를 흐려놓죠. 눈물이 찬 공기 때문인지 감정 때문인지 순간 구분 안 가는 것처럼요.
낮이 짧아지고 그림자가 길어지면, 겨울은 모든 걸 숨기는 것 같아요. 아니, 숨기는 게 아니라 숨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죠. 나무 밑동의 얼룩도, 벤치 아래 얼어붙은 종이컵도, 마치 오래된 기록처럼 남아 있어요. 종이컵의 테두리에 남은 입술 자국처럼 조그만 흔적이 겨울빛 아래선 이상하게 과장돼 보이고요. 겨울은 감정을 흐리고 흔적을 키우는 계절이라 그런가 봐요.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흔적을 보고 의미를 만들어내죠.
병원 대기실 공기도 겨울엔 유난히 무겁죠. 액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는데, 그 사이 공백이 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지나치게 정직한 공백이라 숨이 막힐 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턱을 괜히 손에 얹은 채 창밖을 보고 있는데, 그게 지루함인지, 걱정인지,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건지 알 수 없죠. 겨울에는 이런 모호함이 더 크게 들려요. 밀려 나오지 못한 말들이 공기 중에 떠 있는 것처럼요.
하임리히법이 필요한 순간은 늘 갑자기 오죠. 그런데 사실 신호가 없는 건 아니에요. 작은 기침, 잠깐의 숨 멎음, 가늘게 흔들리는 어깨 같은 것들. 다 쌓이고 쌓이다가 마지막에 드러나는 거죠. 사람 마음에 무언가 걸릴 때도 똑같아요.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조용히 쌓여온 흔적이에요. 말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죠. 드러나는 순간만 갑작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겨울이 되면 뒷모습이 유난히 크게 보이는 것 같아요. 말보다 많은 걸 숨기고 또 말보다 많은 걸 보여주는 게 뒷모습이잖아요. 눈 위 발자국처럼 지나간 흔적만 남았는데 그 안에 방향, 속도, 체중, 리듬까지 다 들어 있죠. 뒷모습은 늘 비밀스럽고, 비밀스러운 것들이 겨울과 잘 어울려요. 공기가 조용히 걸리는 계절이라 그런가 봐요.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하면, 작은 결들이 공기를 베며 떨어졌다가 조용히 바닥에 닿아요. 소리도 크게 안 나요. 들릴 듯 말 듯한 충격음이죠. 겨울의 소리라는 건 대체로 그래요. 크게 울리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래 남아요. 폐 깊은 곳에 걸렸다가 서서히 올라오는 숨처럼요.
오히려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들, 말해지지 않은 채 흘러넘치지 않는 것들, 그런 조용한 압력 같은 거에 더 가깝죠. 어떤 건 토해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몸이 먼저 반응할 때 있잖아요. 그런 순간엔 의미도 멀어지고 흔적만 남아요.
쌓이는 눈도 그렇죠. 결론이 아니라 상태를 만들어요. 덮여가는 지면은 뭔가를 지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시 덮어두는 거예요. 덮여 있다는 사실만 남겨두죠. 겨울의 표면 아래엔 여전히 걸린 것들이 있고, 아직 올라오지 못한 말도 있고, 형태도 잡기 전의 압력들이 남아있어요. 그게 미세하게 흔들리는 동안 겨울은.
그 흔들림 자체를 하나의 상태로 남기는 계절이죠.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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