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사사롭다고 부르는 계절
겨울은 윤곽을 단정하게 정리하죠. 나뭇가지에서 물기를 걷어내고, 골목의 소음을 접어서 서랍에 넣어요. 오전의 공기는 유리처럼 얇아서 손끝에 닿는 순간 금이 가는 것 같죠. 전철 출구 앞 붕어빵 봉지에서 김이 올라오고, 가로등 밑 얼룩은 밤새 굳었다가 해가 들자 천천히 풀려요. 겨울은 늘 과장된 표정을 벗겨내죠. 그래서 겨울의 문장들은 짧고 정확해요.
그대가 슬픔을 사사롭다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 말 역시 겨울의 문장처럼 단정하죠. 하지만 단정함은 종종 감추는 기술이기도 해요. 드러내지 않기 위한 절제는 겨울 옷차림과 닮았죠. 두꺼운 외투 안에 얇은 셔츠가 숨어 있듯, 그대의 말도 체온을 숨기고 있어요.
그대의 슬픔은 소란스럽지 않죠.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처럼 아주 작은 소리로 눌러요. 버튼 위에 남은 지문들은 하루의 반복을 증명하고, 그 지문들 사이로 희미한 먼지가 눌려 있어요. 슬픔은 그렇게 눌린 자국으로 남아 있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의 얼굴, 유리창에 비친 약간 굽은 허리, 오래 쓰지 않아 굳은 손목 같은 것들요. 이런 디테일들은 슬픔이 사사로워 보이도록 그대가 정확한 각도로 몸을 기울였다는 증거예요. 사람들 앞에서 슬픔은 정장처럼 입혀지죠. 잘 어울리지만 눈에 띄지 않게요. 겨울의 실내 온도처럼, 기준에 딱 맞춰서.
아침마다 그대가 커피를 내려요. 드립퍼에서 물이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하고, 향이 퍼지는 시간을 일부러 조금 늘리죠. 커피는 늘 비슷한 맛이지만, 그 비슷함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허락돼요. 컵 손잡이에 남은 아주 미세한 균열을 손가락이 먼저 알아채고, 입술은 조금 늦게 반응하죠.
그대의 슬픔도 비슷해요. 혀가 느끼기 전에 손이 먼저 알아요. 하지만 말은 늘 늦죠. “별일 아니에요.” 이 문장은 설탕을 한 스푼 더 넣는 행위처럼 자연스러워요. 쓴맛이 가려졌다고 해서 사라진 건 아니죠. 씁쓸함은 단맛 아래에서 꽤 오래 버텨요.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는 겨울을 모르는 얼굴들이 웃고 있죠. 그대는 그 앞에서 한 발짝 물러나요. 유리 표면에 비친 얼굴이 광고 속 낙관과 겹치지 않도록 각도를 맞추죠. 겹침은 늘 불편하니까요.
슬픔은 개인의 방처럼 유지되어야 한다고 그대는 믿어요. 그래서 사사롭다고 말하죠. 큰 일에는 공적인 언어가 필요하고, 작은 일에는 사적인 침묵이 필요하다는 규칙을 아주 성실하게 지켜요. 하지만 겨울은 그런 규칙에 잔인해요. 모든 호흡을 드러내니까요. 입김은 숨기고 싶었던 마음의 실패를 조용히 증명하죠.
저녁이 되면 거리의 소리는 한 톤 낮아져요. 차 엔진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심장박동처럼 둔해지고요. 주차장 바닥에 뿌려진 소금가루는 부서진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어요. 그 위를 지나가는 구두굽은 짧은 이야기를 남기죠. 미끄러지다 멈추는 소리, 간혹 새어 나오는 짧은 욕설 같은 것들이요.
그대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고개를 들지 않아요. 관찰은 늘 참여보다 안전하니까요. 슬픔을 사사롭다고 말하는 데에는 이런 계산이 숨어 있어요.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자기 검열이죠. 겨울밤처럼 위험을 줄이기 위해 밝기를 낮추는 선택이에요.
집에 들어오면 난방이 켜져요. 히터에서 처음 나오는 바람에는 묘하게 먼지 냄새가 섞여 있죠. 오래된 책장의 종이들이 천천히 숨을 쉬어요. 표지에 남은 손자국, 접힌 모서리, 퇴색된 밑줄들.
그대는 책을 펼치다 말고 다시 덮어요. 이야기는 늘 지금보다 앞서 가 있거든요. 슬픔은 읽어야 할 페이지를 미루게 만들죠. 사사롭다는 말은 책갈피처럼 쓰여요. 여기까지 읽었다고 표시만 해 두고, 언젠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남기죠. 하지만 그 책갈피가 오래되면, 종이는 그 자리에서 더 쉽게 찢어져요.
전화 알림은 늘 무음이죠. 진동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주 미세한 떨림이 오기 전부터 마음은 먼저 움찔하니까요. 겨울의 냉기는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요. 평소라면 흘려보낼 소식이 피부에 바로 꽂히죠.
그래서 그대는 답장을 미뤄요. 슬픔을 사사롭다고 정의하면,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설명은 열을 만들고, 열은 소문을 만들죠. 조용함을 유지하려고 온도를 낮추지만, 낮아진 온도는 생각을 굳혀요. 얼어붙은 생각은 모서리를 갖게 되죠.
눈 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요. 하얀 입자가 떨어지는 속도를 겨울은 공평하게 나눠 주죠. 그대는 사진 속에 잘 들어가지 않아요. 셔터 소리는 기억을 확정하는 소리니까요. 확정은 늘 부담스러워요. 슬픔도 마찬가지죠. 확정되는 순간 책임이 생기니까요.
그래서 사사롭다고 말해요. 작은 일로 남겨두면 기억의 파일명은 흐릿해지니까요. 하지만 눈은 녹아도 흔적을 남기죠. 물웅덩이에 떠 있는 탁한 얼음 조각들처럼요. 슬픔도 그렇게 색만 바꿔가며 남아 있어요. 사사로움은 사라짐과 다르죠.
겨울 새벽은 가장 솔직해요. 알람이 울리기 전, 집 안의 모든 소리가 과장돼 들리죠. 냉장고 모터 소리, 시계 초침, 창틀을 긁는 바람 소리까지요. 그대는 눈을 뜬 채로 가만히 듣고 있어요. 몸은 아직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안 됐죠.
이 시간에 슬픔은 가장 크게 존재해요. 그런데도 그대는 여전히 사사롭다고 말해요. 자기에게 하는 말은 사실 명령에 가까워요. 크게 느끼지 말 것, 오래 머물지 말 것. 겨울의 규칙은 엄격하죠. 한 번 멈추면 더 쉽게 미끄러지니까요.
밖으로 나오면 길은 이미 정리돼 있어요. 제설차가 지나간 흔적, 말끔해진 인도, 모서리에 밀려난 눈더미요. 도시는 위생적으로 관리돼요. 하지만 눈더미 안을 들여다보면 담배꽁초와 낙엽이 뒤섞여 있죠.
그대의 슬픔도 그래요. 겉으로는 사사롭고, 안쪽은 복잡해요. 이런 이중 구조는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죠. 겨울을 건너는 방법은 단순한 면을 앞에 내세우는 일이니까요.
그대가 슬픔을 사사롭다고 말할 때, 그 말은 결심처럼 들려요. 결심은 늘 칼날을 숨기고 있죠. 필요할 때만 꺼내 쓰기 위해서요. 하지만 칼날은 손잡이 안에서도 분명한 무게를 가져요.
겨울 오후, 해가 기울면 그림자는 길어져요. 작아 보였던 감정도 그늘에 들어가면 늘어나죠. 사사로움은 그림자에서 시험받아요. 발걸음이 멈추는 지점, 유리창에 남은 손의 온기, 벤치의 차가운 철제 촉감 같은 것들요. 이런 것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결국 겨울은 지나가요. 하지만 지나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죠. 낮았던 온도는 기억의 형태만 바꿀 뿐이에요. 봄이 오면 얼음은 녹고 물은 흐르겠죠. 대신 습기가 남아요. 곰팡이는 그 습기를 좋아하고요.
그대의 슬픔도 계절을 옮겨 다니며 그렇게 남아 있어요. 사사롭다는 말은 겨울을 견디기 위한 문장이에요. 살아남기 위한 문법이죠. 하지만 문법이 감정의 내용을 대신해 주진 않아요.
그대의 슬픔은 사사롭지 않아요. 다만 겨울이 그렇게 말하도록, 조용하고 정확하게 훈련시켰을 뿐이죠.
체온을 숨긴 채.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