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랑 같이 지루하지 않을래
심심한 시간을 버티다 보면 별것 아닌 감정들이 문득 떠오르곤 했죠.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을 만든 건 눈부신 사건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던 지루한 시간들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래된 여름날의 눅눅한 공기랑 무기력한 오후, 창밖에서 들리던 파리 한 마리의 윙윙거림, 늘어진 커튼 사이로 스며들던 빛의 가는 결들까지. 그런 것들이 지루함이라는 틈 사이를 파고들면서 감정을 조용히 키워줬던 것 같죠.
지금의 도시는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아요. 간판은 하루가 다르게 모양을 바꾸고, 카페 의자도 방향을 달리하고, 사람들의 대화는 짧고 빠르게 흘러가죠. 잠깐 멈춰 숨을 고르는 그 몇 초조차 뒤처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면 지루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편리함이나 속도 같은 게 남는 게 아니라, 감정이 뿌리내릴 찰나조차 잡지 못한 빈 공간만 덩그러니 남죠. 버스 손잡이의 고무 냄새, 퇴근길 아스팔트의 미묘한 온기, 누군가 지나가며 남기던 미세한 체온 같은 것들도 더 이상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해요.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니까요.
한때 지루함은 감정을 정리해 주는 비밀스러운 방 같은 거였죠. 기분 나쁜 일 하나가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돌다가도, 같은 오후의 지루함 속에서 어느 순간 툭 떨어져 나가곤 했어요. 마음의 무게가 천천히 가라앉던 그 과정은 유리컵 속 얼음이 말없이 녹아 사라지는 걸 오래 지켜보는 느낌과 비슷했죠.
크게 들리지 않지만 확실하게. 그런 시간 속에서 감정은 모양을 찾고, 생각은 방향을 잡았어요. 지루함을 견디는 일이 괴로웠지만, 그 괴로움 속에 생을 버티는 기술이 숨어 있었다는 걸 이제야 뒤늦게 알겠더라고요.
지루하지 않은 삶은 겉으론 꽤 매혹적이죠. 매일 다른 소식이 쏟아지고, 새로운 향이 지나가고, 오래 머물지 않는 관계들만 남을 때, 잠깐 멈춰 깨닫게 돼요. 감정은 자극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구요.
감정은 시간을 먹고 자라고, 지루함을 양분 삼아 서서히 형태를 갖춰요. 빠르게 스쳐가는 순간들은 우리를 흥분시키지만, 그 흥분은 기억으로 남지 못해요. 기억으로 남지 못한 감정은 결국 삶을 흔들거나 바꾸지 못하죠.
어린 시절의 방을 떠올리면, 지루함은 그 방의 공기를 채우던 주성분 같은 거였어요. 창틀에 고여 있던 먼지 냄새, 오래 들여다보면 천천히 흔들리던 벽지 패턴, 간헐적으로 터지던 냉장고 모터의 낮은 소리 같은 것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것들의 쓸모는 오히려 그 의미 없음에 있었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속에선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 조용한 움직임이 지금의 생각을 만든 거였어요.
지금의 시간은 빈틈없이 빼곡해요. 여백 하나 없는 노트처럼 일정들로 앞뒤가 꽉 막혀 있죠. 그 사이에서 감정은 자랄 틈을 잃어요. 화면을 올려다볼 때마다 새로운 영상, 새로운 의견, 새로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를 따라잡느라 감정은 얕아지고, 오래된 사유는 고개를 들 틈을 잃고 말아요.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 늘어날수록 마음이 밝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림자가 지워진 풍경처럼 깊이를 잃어가죠.
지루함은 삶의 실패가 아니에요. 지루함은 하나의 호흡이고, 조용한 침잠이고, 아무도 모르게 감정의 형태를 다듬어주는 어둑한 밤 같은 거죠. 오래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그 순간, 코끝에 닿는 물비린내 같은 냄새, 길 건너 편의점 간판이 깜빡이며 남기는 형광의 잔광들이 모여 삶의 결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빠르게 반응하라고 요구하죠. 머뭇거리지 말고 웃고, 정적이 생기면 채워 넣으라고 말해요. 하지만 채우기만 하면 비어 있어야 할 자리는 금방 사라져요. 그 비어 있음 속으로 감정이 흘러들고, 흘러든 감정이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건데 말이에요.
지루함을 견디는 일은 오래전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고,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마음은 천천히 움직였고, 거친 생각은 매끄러워졌고, 감정의 표면은 비로소 고요해졌죠. 오래된 물웅덩이처럼 잠잠한 그곳엔 보이지 않는 결들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고, 그 가라앉음이 지금의 시선을 만들어 준 거예요.
지루하지 않아서 잃어버린 오늘은 감정의 잔향이 너무 빨리 증발하고, 생각이 깊어질 틈을 잃어버린 하루죠. 빠르게 소비된 감정은 금방 잊히고, 잊힌 감정은 삶을 지탱하지 못해요. 오래 바라봐야 보이는 것들은 이제 보이지 않아요. 매일 달라지던 그림자의 길이, 오후마다 조금씩 변하던 바람의 온도 같은 것들이 마음속 기록에서 빠르게 사라져 버려요.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또 다른 자극이 아닐지도 몰라요. 한때 삶을 단단하게 해 주던 그 느리고 지루한 시간을 다시 들여놓는 일일지도 모르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는 시간, 감정이 가라앉아 다른 모양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말이에요.
지루함을 견디는 일은 귀찮고 답답하지만,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유한 기술이죠. 기계도 알려주지 못하는 생의 리듬, 삶이 스스로 숨을 고르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오늘 필요한 건 아마도 지루해보는 일이에요.
지루함을 다시 삶 속으로 들여놓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 지루함 속에서, 잃어버렸던 감정들이
천천히 모습을 되찾게 될 거죠.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