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감정이 사람을 닳게 하는 방식
그리움이라는 건요, 늘 사소한 틈에서 시작되더라구요.
이를테면 오전도 아니고 오후도 아닌, 회색처럼 애매한 시간대 있잖아요.
식탁 위에 누군가 두고 간 물컵 바닥이라든지, 아무도 앉지 않는 맞은편 의자에 드리운 그림자 같은 거요. 그리움은 그런 데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요. 결코 거창한 장면에서는 오지 않더라구요.
폭우 속 이별이나 마지막 포옹 같은 건, 사실 그리움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어요.
그리움은 늘 준비 안 된 사람을 골라서, 방심한 발목을 툭 붙잡는 쪽이죠.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문득 자기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 있잖아요.
그때 이미 시작된 거더라구요.
괜히 턱선이 흐물거려 보이고, 눈 밑이 전보다 어두워 보이는 순간에요.
아무 이유도 없는데 말이죠.
그리움은 바깥에서 오는 게 아니더라구요.
기억 때문이라기보다는, 지금 안에 비어 있는 게 있어서 생기는 감정이죠.
그리움 앞에서는요, 사람 대부분이 당당해지질 못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당당해질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죠.
이건 싸워야 할 감정이 아니라고, 그냥 두는 게 맞다구요.
그 말은 반만 맞더라구요.
그리움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사실 선택에 더 가까워요.
꺼내서 똑바로 볼 건지, 아니면 일상 소음 속에 슬쩍 섞어버릴 건지요.
사람들이 그리움을 많이 미화하잖아요.
사랑의 증거라느니,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정이라느니 하면서요.
근데 실제 그리움은 전혀 따뜻하지 않더라구요.
차갑고, 묵직하고, 솔직히 좀 비겁해요.
무엇보다 그리움은 책임을 요구하지 않죠.
사랑이 책임을 데리고 온다면, 그리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에요.
그래서 더 위험한 거구요.
그리움은 행동을 시키지 않아요.
전화를 걸 필요도 없고,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고, 고백이나 사과를 안 해도 되죠.
그냥 생각만 하면 되거든요.
생각이라는 건 늘 안전해요.
실패하지도 않고, 거절당하지도 않고, 결과도 안 남기죠.
그리움이 사람을 붙잡는 이유, 거기에 있더라구요.
밤이 되면요, 그리움은 더 정교해져요. 낮에 눌러놨던 장면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죠.
손의 온도라든지, 웃을 때 생기던 눈가 주름, 특정 계절에만 입던 옷의 질감 같은 것들이요.
이상하게 그런 디테일은 실제보다 더 또렷해요. 기억은 늘 현실보다 과장되잖아요.
그리움은 기억을 아주 능숙하게 편집해요. 불편한 장면은 지우고, 어설픈 말은 매끈하게 고쳐 놓고요. 그렇게 만든 과거 앞에서 현재는 늘 초라해 보이죠.
그리움에 당당해지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요, 그 감정이 너무 정직해서예요.
그리움은 자기가 뭘 잃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거든요.
잃은 게 분명해지는 순간, 삶이 선택을 요구하죠.
다시 잡을 건지, 아니면 완전히 놓을 건지요.
그 선택이 너무 아파서, 사람들은 그 이전 단계에 머물러요.
그리움 속에 그냥 앉아 있는 쪽을 택하죠.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가 식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요, 그리움은 말이 없어요.
대신 풍경을 빌려서 말을 걸죠.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지나가는 사람 어깨 위에 얹힌 햇빛, 바랜 간판 색 같은 것들로.
그 모든 게 공범처럼 속삭여요.
지금은 안전하다고, 여기까지만 와도 괜찮다고요.
그리움이랑 자기 연민은요, 생각보다 잘 구분이 안 돼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그때의 자신을 그리워하게 되더라구요.
그 시절의 감정, 그때 가질 수 있었던 가능성 같은 거요. 이 착각이 꽤 치명적이에요.
다시 만난다고 해결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리움은 종종 만남을 피하죠.
막상 연락할 기회가 생기면, 괜히 손이 멈춰요.
메시지를 쓰다 지우고, 통화 버튼 위에서 머뭇거리구요.
그리움이 깨질까 봐서요.
실제의 목소리, 지금의 말투, 달라진 모습은
그리움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거든요.
그리움은 멈춰 있는 이미지를 좋아해요.
계절도 한몫해요.
특히 겨울이라는 계절에는.
공기가 차가워지는 그때, 그리움이 갑자기 빨라지죠.
작년 이맘때를 떠올리게 되고, 그때 옆에 있던 얼굴이 자연스럽게 생각나요.
그리움은 시간의 단면에서 튀어나와요.
정리되지 않은 파일처럼, 필요할 때마다 자동으로 열리죠.
그리움에 조금 당당해지려면요,
그 감정을 너무 크게 보지 않는 게 중요하더라구요.
깊어 보이지만 사실 그리움은 굉장히 반복적이에요.
늘 같은 장면, 같은 문장, 같은 감각만 되풀이하죠.
새로운 건 없어요.
익숙한 아픔만 있을 뿐이죠.
이걸 알아차리는 순간, 그리움은 신비를 잃어요.
근데 사람들은 그 신비를 잘 놓지 않아요.
그리움이 사라지면,
자기가 살아온 시간 일부가 무의미해질 것 같거든요.
그리움은 과거를 정당화해 주는 마지막 장치 같아요.
그때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감정이죠.
결국 그리움은 용기의 문제로 돌아오더라구요.
다시 잃을 용기, 아니면 완전히 끝낼 용기요.
그리움 속에 있으면 아무것도 잃지 않아요.
대신 아무것도 얻지 못하죠.
안전하지만, 계속 닳아가요.
그리움에 맞선다는 건요,
그걸 이겨내는 게 아니라 크기를 줄이는 일이더라구요.
운명에서 기억으로, 신화에서 일상으로 내려놓는 거요.
그러면 그리움은 주인이 아니라 흔적이 돼요.
바닥에 남은 옅은 자국처럼요.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더라구요.
그리움에 기대고 살았다는 걸요.
상처가 아니라 지팡이였다는 걸요.
그걸 내려놓는 순간, 비틀거리긴 해도
혼자 서야 하는 시간이 오더라구.
그게 무서웠던 거죠.
그리움은요, 결국 지나가요.
다만 스스로 지나가게 허락해야 하더라구.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