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 대신 기억이 먼저 오는 시간
겨울 햇살은 늘 늦게 오죠. 아니, 오는 척만 하는 것 같아요. 창문을 열면 공기는 확실히 차가운데, 빛은 유난히 얇아요. 얇다는 건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믿기 어렵다는 뜻에 더 가깝죠. 손등 위에 내려앉은 햇살은 체온을 훔쳐보듯 잠깐 머물다 사라져요.
여름의 햇살이 몸을 설득한다면, 겨울의 햇살은 변명 같아요.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하고는 바로 자리를 뜨는 얼굴이죠.
아침마다 커튼을 걷을 때 같은 생각을 하게 되죠. 저게 정말 햇살일까, 아니면 어제의 햇살이 아직 정리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잔상일까 하고요. 겨울의 빛은 늘 과거형 같아요. 이미 지나간 어떤 따뜻함이 기억 속에서 반사돼 방 안으로 흘러드는 느낌이죠.
겨울 햇살은 현재를 데우지 못해요. 대신 기억을 들춰요. 예전에 괜찮았다고 믿고 싶은 순간들, 그땐 분명 따뜻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장면들 말이죠.
사람들은 겨울 햇살이 좋다고 하죠.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선명해지고, 사물의 윤곽이 또렷해져서 좋다고요. 그런데 그 선명함이 늘 반가운 건 아니에요. 흐릿하면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 겨울에는 전부 드러나거든요. 먼지, 주름, 표정에 난 아주 작은 균열 같은 것들요. 햇살이 닿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그 선명함에서 잠시 빠져나오고 싶다는 뜻일지도 모르죠.
겨울에는 몸이 빛보다 먼저 움츠러들어요. 햇살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어깨는 굳어 있고, 손은 주머니 속에서 나올 생각이 없죠. 햇살이 닿지 않는 이유는 단순해요.
닿기 전에 피하기 때문이죠. 차가운 공기 속에서 괜히 따뜻해진다는 건, 경계심을 풀어버리는 일처럼 느껴지거든요. 겨울은 늘 방어적인 계절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강해지는 때죠.
햇살은 공평하지 않아요. 같은 시간, 같은 거리에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닿고 어떤 사람에게는 닿지 않죠. 창가에 앉아 있는지, 방 안 깊숙이 들어가 있는지의 차이일 수도 있고, 마음의 방향 차이일 수도 있어요.
겨울 햇살은 특히 그래요. 아주 낮은 각도로 들어와서 정확히 맞는 자리에만 머물죠. 조금만 어긋나도 빛은 벽에 걸리고, 바닥에 떨어지고, 사람을 그냥 지나쳐요. 마치 일부러 고르는 것처럼요.
가끔은 햇살이 닿지 않는 자리가 편해요. 따뜻해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는 생각보다 안정적이거든요. 체온이 올라가면 마음도 괜히 기대를 하게 되죠. 기대는 늘 일을 키워요. 겨울 햇살이 내게 닿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기대를 관리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주는 이상한 평온함. 차갑지만 예측 가능하다는 점에서 꽤 믿을 만해요.
겨울 햇살 아래에서 사람들은 자주 멈춰요. 산책하다가, 담배를 피우다 말고, 버스 정류장에서요. 그런데 멈춘다는 게 꼭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죠. 멈춘다는 건 오히려 생각이 더 많이 흐른다는 말이에요. 햇살이 닿는 동안 사람들은 자기 그림자를 보게 되죠. 길게 늘어진 그림자, 어딘가 낯선 형태요. 겨울 햇살이 닿지 않는다는 건, 그 그림자를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죠.
집 안에서 겨울 햇살을 기다리는 일은 거의 의식 같아요. 따뜻한 음료를 준비하고, 창문 근처에 의자를 놓고, 시간을 일부러 비워두죠. 하지만 햇살은 늘 약속을 어겨요. 조금 늦거나, 너무 짧거나, 아예 오지 않아요. 그럴 때마다 알게 되죠.
기다림이란 결국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이라는 걸요. 햇살이 올 거라는 말로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버텨보는 일이라는 걸요.
겨울의 빛은 손으로 잡히지 않아요. 잡히지 않는다는 건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고, 소유할 수 없다는 건 책임질 필요도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겨울 햇살은 늘 무책임해요. 잠깐 다녀가고, 흔적만 남기죠. 창문에 남은 미지근한 온기, 바닥에 희미하게 남은 사각형의 기억 같은 것들요. 햇살이 닿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닿았다고 착각했던 순간이 더 오래 남더군요.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죠. 햇살이 닿지 않는 이유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햇살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요. 정말로 닿지 않았다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겨울 햇살은 그렇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줘요. 닿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증명하죠. 부재가 가장 또렷하게 느껴지는 계절, 그게 겨울이더군요.
겨울 햇살이 내게 닿지 않는 이유는 결국 하나일지도 몰라요. 닿지 않아도 괜찮아졌기 때문이죠. 따뜻함 없이도 하루를 보내는 법을 알게 되었고, 빛이 없어도 방향을 짐작하는 데 익숙해졌어요.
겨울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빛보다 그림자에 먼저 적응하죠. 그리고 그 적응이 끝났을 때, 햇살은 더 이상 필수품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창문을 열어요. 별다른 기대 없이, 거의 습관처럼요. 겨울 햇살이 닿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얼굴로요. 어쩌면 그 순간, 아주 잠깐, 햇살은 방심한 틈을 타 손끝에 내려앉을지도 모르죠. 느껴질 듯 말 듯한 온기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겨울 햇살은 늘 그런 식이니까요. 확신 대신 여운만 남기고 사라지죠.
그냥....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