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킹이라는 상태

너무 잘 맞아서 불편한

by 적적

어떤 문장은 사소한 불평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 생활의 무게가 접혀 있다.

그 무게는 말한 사람보다, 듣는 사람의 쪽에서 더 늦게 반응한다.

문장을 즉시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오래 들고 있었다.


“스타킹 신는 건 답답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말은 방 안에 놓였고, 나는 그 말이 어디에 놓였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테이블도 아니고, 벽도 아니고, 우리 사이의 애매한 거리 위였다. 방은 대답하지 않았고,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그 거리를 유지했다. 문장은 식어갔지만, 식는 속도가 느려질수록 오히려 온도가 또렷해졌다.

그 문장이 말하려던 것이 스타킹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빨리 알아차렸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 말은 다리에 밀착된 얇은 섬유보다 훨씬 오래된 무엇에 대한 반응처럼 들렸다.

피부보다 먼저 존재했던 규칙, 숨 쉬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숨 쉬는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

그녀는 저항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나는 저항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떤 단어들은 관계를 단번에 특정한 방향으로 밀어버리기 때문이다.



스타킹은 늘 계절보다 한 박자 앞서 존재한다.

여름이 오기 전부터 매장에 걸리고,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밀려난다.

그것은 날씨를 따르지 않고 사회를 따른다.

피부색을 균일하게 만들고, 흔적을 지우고, 동시에 노출과 단정함이라는 상반된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다.


그녀가 느끼는 답답함은 분명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얇은 막이 요구하는 태도, 발목에서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긴 문장의 문법.

그 문법을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아침에 그녀가 스타킹을 신는 장면을 떠올린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상상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고무줄이 허리를 조이고, 발끝이 정확히 들어가야 하며, 손톱에 걸리지 않도록 숨을 고르는 순간들.

작은 실수 하나로 하루 전체가 거슬리게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 스타킹은 신중함을 요구한다.


서두르지 말 것, 다리를 함부로 다루지 말 것, 움직임을 계산할 것.

그녀의 문장은 이 모든 요구를 단번에 거부하는 말처럼 들렸고, 그 거부가 나에게까지 닿을까 봐 잠시 숨을 고르게 되었다.



스타킹이 만들어내는 색은 피부의 색이 아니다.

피부가 사회적으로 허용된 상태에 도달했을 때의 색이다.

혈관은 지워지고, 멍은 옅어지며, 체온은 추상화된다.

그 결과로 남는 것은 ‘괜찮아 보이는 다리’다.

그녀의 다리는 이미 괜찮았을 것이다. 스타킹은 그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답답함은 이 반복에서 비롯된다. 이미 충분한 것을 계속 확인해야 하는 노동.

그 노동을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해하지 못한 쪽에 스스로를 남겨두었다.



문득 스타킹의 올이 나간 자리를 떠올린다.

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순식간에 길고 복잡한 선으로 번진다.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실패라기보다 사건에 가깝다.

조심했음에도 발생했고, 발생했기 때문에 기억된다.

그녀의 문장도 그랬다. 설명되지 않았고, 사과되지 않았으며, 그저 발생했다.

그 문장을 정리하지 않기로, 문제 삼지 않기로 결정했다.

문제 삼는 순간, 이 문장은 다른 성격을 갖게 될 것 같았다.



스타킹을 벗는 시간은 대개 하루의 끝에 놓인다.

벗는 순간, 다리는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고무줄 자국이 남고, 피부는 잠시 붉어진다.

그 자국은 금세 사라지지만, 사라지기 전까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답답함은 벗은 뒤에야 비로소 형태를 갖는다.

눌렸던 곳, 숨을 참았던 구간들이 하나의 지도처럼 남는다.

그 지도를 본 적 없지만, 그녀의 말이 이미 충분히 많은 부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답답함은 하루의 특정 시점에만 작동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아침에 신었다가 저녁에 벗는 사이, 여러 번 접혔다 펼쳐지는 상태다.

회의실 의자에 앉을 때, 계단을 오를 때, 바람에 치마가 흔들릴 때마다 스타킹은 자신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존재를 잊게 하지 않는 물건. 그 문장이, 어쩌면 그녀가 나에게 느끼는 거리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가까워서 무시할 수 없고, 그렇다고 벗어던질 수도 없는 상태.



스타킹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선택의 폭은 생각보다 좁다.

색상은 다양하지만 결과는 비슷하고, 두께는 달라도 목적은 같다.

신지 않을 자유는 종종 설명을 요구받는다. 왜 안 신었는지, 오늘은 어떤 날인지.

그녀의 문장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다.

답답하다는 말은 이유를 생략한 채로 남는다.

나는 그 생략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말은 늘 완성되지 않은 채로 전달된다.

특히 이런 문장은 그렇다. 듣는 쪽은 자꾸 해석하려 든다.

불편함일까, 피로일까, 저항일까. 그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에 늘어놓고도, 어느 하나도 선택하지 않았다.

문장은 해석되기보다 놓여 있기를 원한다. 스타킹처럼. 몸에 밀착되되, 설명되지 않은 채로.



그녀의 문장은 그날의 공기 속에 얇게 남아, 쉽게 찢어지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 점이 나를 가장 긴장하게 했다.


답답함은 때로 안락함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

너무 익숙해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 매일 반복되지만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감각들.

불편하지만 견딜 만하고, 불필요하지만 없으면 불안한 것.

그녀의 문장은 그 모순을 정확히 건드린다. 그래서 오래 남는다.

그 말이 우리 사이의 어떤 상태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을, 끝내 부정하지 못했다.



그 문장은 기억 속에서 점점 다른 장면들과 겹친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그녀의 다리, 버스 좌석에 남은 온기, 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의 미묘한 해방감. 이 모든 장면 위에 얇게 겹쳐진다.

“스타킹 신는 건 답답해”라는 문장은 하나의 설명이 아니라, 여러 장면을 연결하는 실처럼 기능한다.

끊어지지 않지만 팽팽해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터질 것 같은 상태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주장도 결론도 아니다.

설득도, 반박도 아니다. 다만 어떤 상태다. 이미 신어버렸고, 아직 벗지 않은 상태.

그녀의 답답함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고, 이해하려는 나의 태도 역시 그녀를 더 답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문장은 여전히 거기 있다.

피부와 사회 사이, 그녀와 나 사이,

아직 말이 되기 전의 거리 위에 얇게 걸린 채로.



아직 올이 나가지 않은 채.

사진 출처> pinterest



























이전 19화가임, 폐경을 앞둔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