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치지 않고

그쳤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물기.

by 적적


느려지는 것은 항상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느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직 괜찮다고, 아직 제 속도로 걷고 있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확인한다. 그러나 발은 이미 안다. 발목이 조금 더 조심스럽게 꺾이고, 숨이 길어지고, 다음 발을 내딛기 전에 아주 짧은 망설임이 생긴다. 그 망설임은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몸 안에서는 분명한 사건이다.


비는 늘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고 싶어진다.

하늘 탓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 구름과 기압, 예보되지 않은 저기압의 이름. 지도 위에서 번지는 파란색. 그러나 이 골목에서는 그 변명이 잘 통하지 않는다. 비는 위에서 떨어진다기보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래전 스며든 습기가 뒤늦게 표면으로 밀려 나오는 것처럼.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어떤 감정이, 다른 이유를 붙잡고 다시 떠오르는 방식처럼.


이 골목은 번화가와 붙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대로의 네온은 모서리에서 꺾이며 멈춘다. 그 빛이 더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준다. 밝지 않다는 것은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표정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금속과 먼지, 젖은 고무 냄새가 낮게 깔린 공기 속에서 사람의 얼굴은 조금 무너져도 괜찮다.



비는 이 골목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친 것처럼 보여도, 벽 안에서는 여전히 물이 이동한다. 사람도 비슷하다. 겉으로는 멈춘 척하면서 안쪽에서는 계속 흔들린다. 배수관 어딘가에서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때, 이유 없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아직도 반응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가게 셔터에 매달린 물방울은 떨어지기 직전 가장 둥글다. 완전해 보이는 순간이 가장 위태롭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은 그 장면을 오래 본다. 떨어질 것을 알면서. 차라리 빨리 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떨어지면 허전해질 것을 예감한다. 모순은 부끄럽지 않다. 다만 숨길뿐이다.



기록은 늘 늦는다. 마음이 이미 지나간 자리를, 생각이 한 박자 늦게 따라간다. “괜찮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골목에서 늦음은 실수가 아니라 고백에 가깝다.



우산은 여기서 기능을 잃는다.

비를 막으려고 펼친 천 아래에서 오히려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탁, 탁, 탁. 빗방울이 얇은 천을 때릴 때마다, 머리 위에서 작은 폭로가 반복되는 기분이 든다. 감추려고 한 생각들이 소리로 증폭된다. 어깨는 마르지만, 마음은 더 선명해진다.



사람은 비를 피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젖는다. 일부러 웅덩이를 피하지 않거나, 아주 살짝 가장자리를 밟는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는 계산. 완전히 멀쩡하지도 않으려는 변명. 그 애매한 선택이 인간을 드러낸다.

비는 이 골목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신발 안쪽으로 옮겨간다. 젖은 양말이 발가락 사이를 붙잡을 때, 괜히 짜증이 난다. 이런 사소한 불편에 예민해진 자신이 못마땅하다. 동시에, 이 감각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무언가를 통과했다는 증거가 사라질까 봐.



벽의 전단지는 번지고, 활자는 흐려진다. 문장이 형태를 잃어갈 때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또렷한 문장은 너무 단정하다. 번진 글씨는 변명의 여지를 남긴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말들이 그 사이로 스며들 공간을 얻는다.


골목 끝의 고양이는 몸을 떨지 않는다. 젖은 채로 앉아 있다. 그 모습이 부럽게 느껴진다. 급하게 털어내지 않아도 되는 태도. 당장 마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표정. 사람은 늘 빨리 정리하려 한다. 감정도, 관계도, 기억도. 그러면서도 정리되지 않은 것을 몰래 품고 다닌다.



비는 이 골목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말끝에 매달린다. “괜찮다”는 말은 실제보다 더 오래 공기 중에 머문다. 듣는 사람보다 말한 사람이 먼저 안다. 그 말이 완전한 진술이 아니라는 것을. “곧”이라는 단어는 시간을 미루는 동시에 자신을 미룬다. 아직은, 지금은, 나중에.



젖은 옷자락을 털어내는 손은 조금 과장된다. 괜히 크게 턴다. 그 동작 안에는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섞여 있다. 분명 비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비 덕분에 그렇게 해도 이상하지 않다. 자연현상은 훌륭한 핑계가 된다.

가로등 아래 마른 길 위에 얇은 광택이 떠오른다. 실제로는 젖어 있지 않은데도, 젖어 있었던 흔적이 빛을 다르게 받는다. 사람도 그렇다. 이미 끝났다고 말해도, 한 번 젖었던 마음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반사하지 않는다.



골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경계를 오래 붙잡는다. 마른 것과 마르지 않은 것 사이에서, 끝난 것과 끝나지 않은 것 사이에서. 그 애매함이 불편하다. 그래서 사람은 자꾸 결론을 서두른다. 다 끝났다고,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원래 이런 거라고.


선언은 표면에 닿지 않는다. 표면은 기억한다.



지금은 그치고 있다.

적어도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몸 어딘가에서는 아직 작은 물방울 하나가 이동 중이다.

말하지 않은 문장 사이에서, 밤에 혼자 깨어 있는 시간 속에서, 아무 이유 없이 멈춰 서게 되는 순간에.



비는 이 골목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그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바닥은 거의 말랐다.

그 거의라는 말이,



사람을 가장 오래 붙잡는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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