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도시이야기.

느린 걸음을 멈추고

by 적적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어떤 물체가 움직일 때 주변 세계도 함께 움직입니다. 앨리스가 한참을 달렸는데도 제자리인 이유를 궁금해하자 붉은 여왕이 말합니다. “그나마 힘껏 달렸으니 제자리에 있는 거야. 앞으로 가고 싶으면 지금보다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해.” 앞으로 가려면 더 빨리 뛰어야 한다는 말은 느리게 걷다가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흐린 화요일 아침입니다.


풍경을 훔치러 길을 나섭니다. 정박할 곳 없는 시선은 뱃머리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거리를 걷습니다. 길가마다 메마른 채 처음 도착했던 여행지의 흙이 될 채비를 끝낸 풀들이 누워있습니다. 강아지풀 가족은 하루를 바람이 부는 쪽을 바라다보는 근무를 합니다.


아침 간판들이 버려진 명함처럼 가게 앞에서 등을 기대고 있던 간판은 늦게 길가로 일을 하러 나갑니다.

아침 일찍 문을 연 빵 가게에서 정박합니다.


벽엔 더럽혀진 파울 클레의 그림 중 물고기 마법을 훔칩니다. 매장 밖으로 걸어 나오는 음악이 U2라는 걸 알고 나서야 빵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 후각이 얼마나 둔감했는지 이제야 알아가는 기분입니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리와 그림은 같은 속도로 노를 저어 가게를 끌고 나갑니다


아침의 문맥은 아무렇게나 뒤섞인 타로 같습니다.

이제 어떤 카드를 뽑을지 그리고 그 카드의 그림이 어떻게 해석될지 팔짱을 끼고

기다리는 아침입니다.


아침의 물웅덩이는 도시의 거울 같습니다. 그 속에는 지상의 모든 건물의 피뢰침까지 다 고여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웅덩이를 자세히 보면 물웅덩이와 물웅덩이 사이를 작은 검은 수로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웅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면 빗방울엔 작은 생명체가 태어납니다. 빗방울은 물웅덩이 표면에 닿으면 알을 깨고 부화하는 작은 수정란입니다.


소금쟁이들이 물 위를 걸으며 발자국을 냅니다. 가는 다리로 물 위를 걸어 수로를 따라 다음 웅덩이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편도로 끊은 종착지까지 물웅덩이 위를 빠르게 발을 움직여 미끄러집니다.

이틀 동안 내린 비와 그 비가 고여있는 물웅덩이와 그곳에 투영된 세상과 비가 되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고 안개로 가득합니다.


옷을 충분히 적실만한 비는 안개가 걷히며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기온은 더욱더 떨어져 저 옷을 다시 입을 수 있을까 하고 마지막까지 걸어두었던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었습니다.

덥지 않습니다. 아니 코트가 따스하게 느껴졌습니다.


10월이 되면 안산은 비교적 우울합니다.

뭐 어느 도시건 신나는 일만 가득한 도시는 없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우울은 더 깊어져 갑니다. 아마도 우울의 협곡이 들어선 도시엔 협곡 사이로 부는 바람이 기이한 휘파람 소리로 혹은 기묘한 슬픔의 메아리로 바람이 지나갑니다.


문득 햇살이 그리워집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늘어진 전선 아래 고여있는 어두운 물방울의 전등 알들을 바라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