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말이 몸속에 더 깊이 남는 방식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느라 떠나지 못하는 공항의 여행객처럼, 삭제된 초고는 출발과 도착 사이에 붙들려 있다. 목적지는 인쇄된 문장이었을 텐데, 탑승권은 어쩌다 보니 먼저 찢겼다. 출발 시간은 미뤄졌고, 안내 방송은 반복되지만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떠나지 못한 채로 오래 남아 있는 문장. 초고의 체온은 거기서 생긴다. 아니, 생긴 다기보다 빠져나가지 못한다. 공항 의자는 묘하게 차갑다.
등을 기대면 허리가 먼저 거부한다. 조금만 졸아도 이름이 불릴 것 같아서 눈을 완전히 감지 못한다. 오래 머물기 위해 쓰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통과하기 위한 암시의 자리였는데, 임시가 영구처럼 버틴다. 통과되지 못한 문장은 생각보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몸이 먼저 떠나지 못한다. 캐리어는 닫혔고, 마음은 이미 먼 도시의 공기를 상상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어정쩡함은 설명하기 어렵다. 실패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고, 성공을 준비 중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럽다.
그 애매함이 문장에 미열을 만든다. 미열은 크지 않다. 대신 오래간다. 열이 있다기보다, 열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남는다. 정확하지 않은 체온. 첫 여행은 대개 과장으로 시작된다. 아직 보지도 못한 구름에 감동하고, 이륙의 순간을 상상하며 심장이 먼저 앞서 나간다. 감정이 결론보다 빨리 달린다. 생각이 따라오지 못하는데도 문장은 숨이 찰 때까지 이어진다.
속도는 아름답지만 어딘가 위태롭다. 허락받지 않은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래서 삭제 버튼이 눌린다. 안전벨트처럼, 반사적으로. 격렬한 흔들림이 있어서라기보다,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문장이 과했는지, 솔직했는지, 아니면 정확했는지. 그냥 어딘가 불편했다. 그 불편함이 타인 때문이었는지, 스스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 채.
연착은 사고가 아니다. 그렇다고 안심도 아니다. 떠나긴 떠날 것 같은데, 언제인지는 모른다. 초고 역시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다만 지금은 아닌 상태.
쓰였지만 말해지지 못한 상태. 존재했는데, 인정받지 못한 상태. 그 중간에서 문장은 얇게 떤다. 아니, 떤다고 말하면 너무 드라마틱하다. 그냥 가만히 남아 있다. 남아 있다는 사실만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린다. 공항 전광판에는 문구가 바뀐다.
DELAYED.
GATE CHANGE.
BOARDING SOON.
“지금은 과하다.”
“조금 더 다듬자.”
“이건 나중에.”
겉으로는 합리적인 판단.
그 아래 말로 설명하기 애매한 두려움.
너무 정확하면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너무 솔직하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래서 문장은 보류된다.
잠시라고 적어두지만,
잠시는 오지않거나. 어떤 문장은
계절을 건너기도 한다.
그 사이 다른 글들이 먼저 세상으로 나간다. 무사히 이륙하고, 무사히 도착한다. 완성본은 온도를 조절한다. 뜨거운 부분을 식히고, 떨리는 문장을 곧게 세운다. 무사한 비행을 위해서다. 난기류도 없고, 착륙도 매끄럽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붙잡히는 것은 다른 쪽이다. 떠나지 못한 비행. 삭제된 초고. 지워졌는데, 더 또렷해지는 문장이 있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아니, 남겨졌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지워놓고, 뒤늦게 다시 떠올린다.
왜 그랬는지 묻지도 못하면서. 공항에는 수많은 화면이 있다. 뉴스, 광고, 목적지의 풍경. 초고 역시 외부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누군가 이미 썼던 표현, 비교적 안전한 어휘. 그런 문장은 비교적 쉽게 통과된다. 그러나 어떤 문장은 무겁다. 수하물 규정을 초과한 고백, 기내 반입이 허용되지 않는 감정. 탑승구 앞에서 멈춰 서는 말들.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감정은 어딘가로 보관된다. 보관소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 안다. 삭제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온도를 낮춰 저장하는 일에 가깝다. 그 열은 나중에 다른 문장에서 갑자기 되살아난다. 전혀 상관없는 문장처럼 시작했다가, 문득 그때의 체온이 스며 나온다.
왜 여기서 이런 문장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한다. 연착이 길어질수록 여행객은 말을 줄인다. 처음에는 직원에게 묻고, 주변 사람과 정보를 나누지만, 시간이 쌓이면 질문이 줄어든다. 체념인지, 적응인지 모를 상태.
처음에는 설명이 많고, 설득이 많고, 증명이 많다. 삭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문장은 말이 아니라 상태로 남는다. 해명하지 못한 채, 다만 있었던 온도로. 완성본은 출발과 도착을 약속한다. 기승전결이 있고, 결론이 있다. 그러나 삭제된 초고는 활주로를 맴돈다.
이륙하지 못한 채로 맴도는 모습은 조금 우스꽝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초라하다. 그런데 그 초라함이 더 가깝다. 덜 정리된 얼굴, 약간 붉어진 뺨, 각도 맞지 않은 시선. 완성본은 그 표정을 다듬는다. 빛을 고르고, 그림자를 정리한다. 말하는 이의 얼굴을 약간 바꾼다. 삭제된 초고는 조정되기 전의 빛을 품고 있다. 과하고, 조금 민망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정확한 빛. 도착은 결과다. 기다림의 체온까지 데려가지는 못한다. 활주로를 바라보며 서 있던 시간, 혹시 영영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예감. 그 불안이 여행의 깊이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은, 대개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삭제된 초고 역시 그렇다. 통과되지 못한 진심이 오히려 더 정확하게 남는다. 이 글은 완결을 서두르지 않는다. 약간의 지연을 품은 채 멈춰 선다. 더 쓰면 정리될 것 같지만, 동시에 망가질 것 같은 지점에서 머문다. 문장이 정보가 아니라 상태가 되는 순간. 설명 대신 미열로 남는 자리. 완벽한 이륙은 드물다. 대신, 떠나지 못한 문장이 오래 남는다.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을 떠나지 못하는 첫 여행의 여행객처럼, 삭제된 초고는 아직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이미 돌아가기엔 늦었고, 떠나기엔 확정되지 않은 상태. 그 애매한 체류 속에서 문장은 완성 대신 온도로 남는다. 조금 식지 못한 채로. 조금 정리되지 않은 얼굴로.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채로.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