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계집아이의 초봄
이불 밖으로 발을 내밀면, 먼저 닿는 건 공기라기보다 어떤 생각 비슷한 거예요. 차갑다, 하고 말하기 전에 이미 한 발 물러나고 싶은 감각이 먼저 와요. 피부보다 먼저 알아채는 건 늘 이런 종류의 것이죠. 그런데 이상하죠
나를 밀어내는 대신 안쪽으로 조금 더 끌어당겨요. 바깥은 분명 추운데, 안쪽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세한 상승이 시작돼요. 몸은 가만히 있는데, 체온이 아니라 체온의 방향 같은 게 먼저 움직이는 느낌이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게 지금이에요.
창문을 아주 조금 열어두고 숨을 들이마시면, 공기가 아니라 계절의 중간 같은 게 들어와요. 아직 꽃 냄새는 아니고, 그렇다고 겨울 냄새라고 하기에도 어딘가 부족한 상태요. 이름이 없다는 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이 더 오래 남아요. 목구멍 어디쯤에 걸려서 삼켜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 채로요.
머무는 것들은 대체로 떠나기 직전이라고들 하는데, 이건 떠날 것 같지가 않죠. 떠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가장 느리게 이동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오래 붙잡히는 건지도요.
거울을 보면 볼이 조금 붉어져 있어요. 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구분이 잘 안 돼요. 그런데 그 구분 안 되는 상태가 나쁘지 않아요. 뭐든 둘로 나뉘는 순간, 하나는 남고 하나는 사라지잖아요. 애매한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늘어져요.
형태를 바꾸면서 계속 남아 있죠. 그래서 얼굴을 한 번 더 만져보죠.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사이의 온도요. 온도에도 중간이 있고, 그 중간은 늘 설명을 거부해요. 설명되지 않는 건 쉽게 끝나지 않죠.
골목으로 나가면 나무들이 아직 마른 손처럼 서 있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척하면서요.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가지 끝이 아주 조금 부풀어 있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요.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요.
손톱으로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아서, 결국 건드리지 못해요. 깨지기 직전의 상태는 늘 완성에 가까워 보여요. 아직 아무것도 아니면서, 이미 거의 다 된 것 같은 얼굴이죠. 완성되기 전의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걸 품고 있다는 느낌, 그게 자꾸 눈에 걸려요.
햇빛은 요즘 들어서 좀 달라요. 날카롭지 않고, 물처럼 번져요. 담벼락을 타고 내려오는데, 흐른다기보다는 스며든다는 쪽이 더 맞아요. 표면을 따라 이동하는 게 아니라,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는 느낌이죠. 먼지가 갑자기 또렷해지고, 금이 간 페인트가 부드러워 보여요. 낡은 것들이 덜 낡아 보이는 순간이 잠깐 생겨요.
그 잠깐이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때 손등에 닿는 온도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워요. 따뜻하다고 하기엔 부족하고, 차갑다고 하기엔 이미 지나간 느낌이죠. 온도에도 잔상이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돼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바람에 내밀어보면, 바람은 여전히 차가워요. 그런데 예전처럼 싫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 위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게 느껴져요.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요. 보이지 않게 쌓여 있던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는 과정처럼요.
안쪽에 숨어 있던 작은 열이 바람을 만나서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아요. 체온은 혼자 있을 때보다, 이렇게 부딪힐 때 더 분명 해지죠. 부딪힌다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쪽에 가까운 일이니까요.
교실 창가에 앉으면 빛이 책상 위에 얇게 깔려요. 종이 위의 글씨는 조금 흐려지고, 대신 종이의 결이 더 또렷해지죠.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고, 보이던 것이 조금 물러나는 식으로요. 나는 손을 그 위에 올려두고 일부러 움직이지 않아요.
움직이면 사라질 것 같아서요. 가만히 있을 때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기다리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것들이요. 기다림은 시간을 늘리는 게 아니라, 온도를 바꾸는 일 같아요. 같은 시간인데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 그게 기다림 같아요.
운동장은 비어 있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아요. 올라가는 것과 내려오는 것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요. 누군가는 아직 겨울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봄이라고 하죠.
둘 다 맞는 것 같고, 또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계절은 늘 경계에서 가장 또렷해요. 완전히 되기 전, 아직 아닌 상태요.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 들어요.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가지 않은 채로, 조금씩 기울어지는 상태죠. 기울어진다는 건 넘어지기 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미 시작됐다는 뜻이기도 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림자가 길어져요. 아침보다 더 길고, 더 느리게 따라와요. 낮 동안 데워졌던 것들이 서서히 식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식어가는 속도에 약간의 아쉬움이 붙어 있어요. 빨리 식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식는다는 걸 알고 있는 마음이죠.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쪽에 가까운 마음요. 숨을 더 깊이 들이마시면, 안에 남아 있던 낮이 바깥의 저녁과 섞여요. 섞이는 순간, 둘 다 조금씩 다른 것이 돼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색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아요. 파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계속 바뀌고 있어요. 고정되지 않는 색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돼요. 그 아래에서 나는 조금 더 따뜻해지고 있어요.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금방 사라질 것 같아서, 그냥 두는 쪽을 택해요. 설명은 늘 끝을 만들거든요. 끝이 생기면, 그전까지 있었던 것들도 같이 정리 돼버리니까요. 정리된다는 건 때로는 사라지는 거랑 비슷하니까요.
밤이 되면 다시 추워져요. 낮보다 더 분명하게요. 그런데 이불속은 이상하게도 낮보다 더 따뜻해요. 몸에서 나온 열이라기보다는, 하루 동안 지나간 것들이 남긴 어떤 온도 같아요.
빛이 닿았던 자리, 바람이 스쳤던 순간, 아직 피어나지 않은 것들을 오래 바라봤던 시간들이 섞여서 하나의 체온처럼 남아 있어요. 지나간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형태를 바꿔 남아 있다는 느낌, 그게 온도라는 식으로 남아 있어요.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계속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더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어요. 아직 꽃은 하나도 피지 않았는데, 이미 너무 많은 게 시작된 것 같아요. 시작이라는 말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미 한참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죠. 시작과 계속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 그게 지금 같아요.
몸이 조금 따뜻해요. 아니면 따뜻해지려고 하는 중일 수도 있고요. 올라가고 있는 건지, 이미 올라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아직 이름을 갖지 않은 채로, 계속 머물고 있는 상태요. 멈춘 것 같으면서도 아주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 그런 온도로요.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