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간의 사소한 시간들(~ 19. 4. 15)
긴 싸움이 이제 끝이 보이는 듯싶다. 마스크와 아크릴 너머로 마주 보며 어색하게 웃던 때를 지나고 보니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나는 다행인지도 전염병이 발병하기 직전에 떠밀리듯 여행을 다녀왔다. 외롭고 고되기만 했던 것 같은 그 시간들은 갑갑한 마스크 사이로 새어 들어와 어느샌가 가장 설레었던 순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리저리 휘둘리듯 다녀온 여행에 힘든 기억은 하나도 없고 온통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떠나고 싶게 말이다.
그래서 떠나는 대신 그때의 기억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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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여행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긴장과 걱정으로 설렘도 느낄 새 없이 떠났지만 우려했던 일은 다행히 없었다. 준비를 가장 많이 했기 때문에 기대 역시 크던 이탈리아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조차도 긴 시간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시종일관 휴대폰에 의지하며 소극적으로 돌아다니는 내게 기꺼이 말을 걸어주던 친절한 여행자들도 만났다. 일회적이고 단발적이던 그들과의 대화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던 것도 잠시 나는 금세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 스스럼없이 지난 일정을 나눴다. 로마에서 시작이던 나와는 달리 로마를 끝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는 이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은 내게 파리의 맛집이나 살인적인 스위스 물가를 이겨내는 팁 같은 것들을 전해줬다.
조금은 긴장이 풀리고 조금은 설렘이 추가된 파리는 모든 곳이 영화 같았다. 낭만적인 풍경을 앞에 두고 들뜬 관광객들과 그것마저 풍경으로 두고 걷는 사람들을 지나며 종종 현실을 잊기도 했다. 홀로 방문한 오르세에서 그림과 건축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알지 못했던 거장의 배경을 둘러보며 우울한 감성에 빠져보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야 겨우 말이 트인 같은 방 동생들과 숙소에서 기울이던 와인이, 처음이라 어설프게 잡아 든 와인잔에 다 같이 낄낄 웃어대던 밤이, 지나고 보니 파리의 한 풍경으로 남았다. 무계획으로 스위스에서 만난 이들과 배꼽 빠지게 웃으며 보내던 시간 역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예상대로 열흘은 비가 내렸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오히려 비가 와서 덜 외로웠던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좋았겠지만, 그 누군가가 없어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왜 나는 혼자 그 먼 곳을 다녀온 걸까. 왜 굳이 돈과 시간과 체력을 써가며 낯선 곳을 헤매며 느끼지 않아도 될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끼다 돌아온 걸까. 여행이 싫다면서 자꾸 여행을 떠나는 걸까. 여행지에서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했다.
나는 아마도 처음으로 돌아가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시내로 나가던 기억, 내가 가진 돈으로 무언가를 샀던 기억,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했던 기억들. 긴장되고 떨리고 그리고 뿌듯했던 기억들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고, 낯선 곳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가봤던 길만 걷고 먹었던 것만 먹으며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는 익숙하고 편한 길에서 벗어나 다시 어렸을 때처럼, 처음 무언가를 접해봤던 그런 사소한 시간들을 다시 맞이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왔다고, 고작 이주 낯선 곳을 다녀왔다고 내게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여전히 설렘보다는 긴장과 두려움을 가지고,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조금은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잠깐이라도 새로운 곳을 걸어보려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시도를 해 본다. 지난 여행이 만들어준 얄팍한 여유를 일상에서 누려보기로 한다. 이런 마음을 계속 붙잡으려 또다시 나는 떠나고 싶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