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사는 로마에서(19. 4. 1~)
처음 떠나는 유럽 여행의 출발지는 고민 없이 로마를 떠올렸다. 역사의 중심에서 여행을 시작한다는 게 의미가 있기도 했고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로마에 대한 환상 또한 컸다. 무엇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내겐 심심할새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 도시가 필요했다.
열두 시간을 날아 도착한 로마는 이미 어둑한 하늘이 뒤덮고 있었다. 비행기가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미리 신청해둔 택시기사는 찾을 수가 없었고 유심칩을 바꾼 핸드폰은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종종걸음으로 공항 인포메이션으로 달려갔지만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새벽 세시의 서울에 있는 동생과 전화 연결이 되어 대중교통으로 로마 시내 가는 방법을 들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다양한 외국어에 둘러싸여 공항철도에서 지하철로 환승해 겨우 숙소 근처의 역을 빠져나오자 까맣게 뒤덮은 로마의 하늘 아래 조명을 받아 빛나는 성곽 같은 건물들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과거로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우둘투둘한 돌길을 따락 걸어 도착한 숙소에는 방문처럼 열고 닫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어떻게 작동시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첫날밤엔 캐리어를 들고 4층 계단을 낑낑거리며 올랐다. 부랴부랴 체크인을 하고 뜨거운 물에 하루 동안 빳빳하게 세운 긴장을 씻어내고 나서야 새삼 로마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장시간 비행의 피로가 몰려왔지만 시차 때문인지, 여행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아 밤새 이탈리아 여행책과 미리 신청한 투어 일정을 들춰봤다.
로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많은 환상과는 달리 알고 있는 것은 콜로세움 밖에 없어 출발 직전 급하게 일일투어를 신청했는데, 그중 첫 일정이 바티칸 투어였다. 바티칸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많기도 하고 방대한 예술품들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 갈까 말까 고민하던 중에 반나절 투어가 있기에 냉큼 신청했다. 오전/오후로 시간대가 나줘진 투어 잔여석이 오후밖에 없어 하루 일정이 애매하다 싶었는데, 뜨거운 아침 햇살을 피할 수 있어 오히려 가볍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다음에 또다시 로마를 오게 된다면 투어가 아닌 개인 일정으로 찬찬히 둘러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지만, 가이드의 꼼꼼한 설명과 안내로 넓은 바티칸 박물관에서 핵심적인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투어에서 얻은 지식이 이후 여행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예술품을 둘러본 후 감상하게 된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를 보면서 내가 로마에 왔구나 하는 실감도 났다. 피에타를 보기 위해 성 베드로 성당까지 둘러보고 나오자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다음 날 떠난 남부 투어는 폼페이 유적지와 포지타노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는데, 투어 시작부터 쏟아진 비 때문인지 흐릿한 폼페이의 풍광이 마치 그날로 되돌아간 것 같은 음울함을 선사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이 남기고 간 것들보다 그들이 떠난 곳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들꽃들이 어쩐지 눈에 밟히는 곳이었다.
아쉽게도 비가 계속 내려 아기자기한 포지타노의 해변은 제대로 둘러보기 어려웠지만, 투어에서 만난 이들과 걸으며 나름의 운치를 즐겼다. 밤늦게 도착한 로마에서 하루를 함께 한 이들과 먹은 뜨끈한 쌀국수도 맛있는 추억으로 남았다.
로마를 떠나기 전날에 콜로세움에 올라갔다. 콜로세움이 세워지고 허물어지고 그리고 다시 세워지고 있는 과정에 대해 들으며 과거의 누군가가 서 있었을 곳을 짐작하며 콜로세움을 내려봤다. 상상할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는 고대 로마인들의 삶을 생각하며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언젠가 또 다른 시대의 누군가들도 고대 로마인을 떠올리며, 그들을 떠올리는 지금의 우리를 떠올리며 이 비슷한 기분으로 콜로세움에 서 있게 될까.
이어 포로 로마노와 판테온도 다녀왔다. 오래된 역사를 듣고 보는 것은 재미와는 별개로 많은 상념을 일으켰다. 대부분은 무너져버린 옛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에 관한 것들이었다. 무너졌기에 지금의 내가 이곳에 서 있는 것임에도 이상하리만치 착잡한 마음이었다. 다시 세울 수 없는 지나가버린 시간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아쉬움 가득한 로마 일정을 마무리했다. 여유가 있었다면 휴대폰이 아닌 오래된 골목의 풍경이나 어쩐지 오돌토돌 돌길을 감상하며 걸었을 텐데, 바짝 긴장 상태로 돌아다니느라 로마를 완벽히 즐기진 못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좋았다. 과거로부터 남겨진 돌무더기들이 나를 감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고 여전히 신도를 맞이하는 성당 안에서 경건함을 느꼈다. 투둑둑 떨어지는 빗방울과 오래도록 빗물이 고여있는 돌길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무심하게 이야기를 더하고 있는 로마의 일상들이 오래도록 기억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