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의 피렌체에서(19. 4. 5~)
내게 피렌체는 냉정과 열정의 도시다. 사춘기 시절에 나는 에쿠니 카오리에 빠져 있었다. 특히 영화로 접했던 냉정과 열정 사이는 언젠가의 로맨틱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아오이와 준세이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펼쳐지던 노을에 물든 피렌체는 내겐 사랑의 풍경과도 같았다.
피렌체에 도착한 다음날, 오전 일찍 조토의 종탑에 올라 두오모 뒤로 펼쳐진 피렌체의 전경을 감상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만같았다. 어릴 땐 이해할 수 없던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내게도 그런 순간들이, 마음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작고 작은 일들이 비좁은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떠올랐다.
옛 시간을 더듬으며 미술관을 걷듯 피렌체를 돌아다녔다. 우피치 미술관을 둘러보던 중에 가이드로부터 복원 과정의 약 70퍼센트는 묵은 때를 벗기는 작업이라는 말을 들었다. 창고 한켠, 어느 집의 구석 어딘가에서 오랜 세월 쌓아온 먼지를 작은 면봉으로 세밀하게 떼어내는 작업, 그다음은 당시 작가가 주로 사용했던 색감을 연구해 최대한 작품의 본래 모습을 살리는 일이라고 한다. 운 좋게도 몇 년 동안 복원 과정에 있던 작품 한 점이 최근 전시되고 있었다. 그 작품의 복원 전, 후를 보며 끝없이 과거를 상상하고 관찰해야만 하는 복원사의 역할에 대해 잠시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몇 년 혹은 십수 년을 작품과 함께한 이름 없는 복원사에 대한 생각이 우피치를 떠나 피렌체를 걷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후엔 다시 두오모의 쿠폴라에 올랐다. 서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구름 아래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석양과 이미 물들어버린 피렌체를 내려보며 작은 스크린 앞에 앉은 열다섯의 나를 생각했다. 입을 벌리고 영화 속 풍경에 빠져들면서도 그곳에 가고 싶다는 꿈조차 꾸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어쩐지, 안쓰러웠다.
로마가 도시라면 피렌체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고 아담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우아했다. 그림처럼 그려진 성당의 대리석 색채가, 푸른 하늘 아래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붉은 지붕이 아름다웠다. 피렌체의 일몰을 감상하기 위해 자리 잡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누군가 물었다. 이곳이 마음에 드냐고. 그는 이곳이 매우 마음에 든다고 했다. 어제는 정말 멋진 뷰가 펼쳐졌다며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다. 어제도, 오늘도 피렌체는 멋진 곳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다.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그렇게 느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