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3.6.9의 9
이직하면 어때? 하는 초롱초롱 생기어린 질문에 종종 이런 비유를 하고는 합니다.
생면부지 남의 집 부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려운 요리를 아주 맛있게 실수 없이 그리고 정해진 시간 내에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식칼은 어느 서랍에 있는지, 감자칼은 있는지 없는지, 소금은, 후추는, 양파는 어느 서랍, 어느 구석, 무슨 색의 봉지안에 들어 있는지 찾다보면 한세월 흘러 혼자 바쁘기만한 바보가 되어 있는 일이라고.
너무 안쓰럽게 생각할 일만도 아니기는 합니다. 소금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쯤이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아지는 일입니다. 보다 문제는 그런거죠. 우리집에서는 국의 간을 맞출때 주로 국간장을 쓰는데, 알고보니 이집은 소금을 쓰더라. 원래 살던 집의 소금은 한꼬집만 넣어도 간간하니 짠 맛이 베어나는 소금이었는데, 이집 소금은 설탕인지 소금인지 분간도 안가더라. 그런 문제도 사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기는 하지요.
운이 좋게 마음씨 좋은 조력자를 만나게 된다면, 시간은 훨씬 단축될 일입니다. 우리집은 소금 대신 새우젓을 쓴단다. 하는 식의 조언을 받을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이 집 식구들의 입맛에 꽤 그럴싸한 요리를 내어 놓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행운은 쉬이 오지 않습니다. 이직 초년생(?)의 첫번째 좌절감은 실망한 손님들의 얼굴을 민낯으로 마주해야할때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내려놓고, 묵묵히 오늘의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내면서 내일은 나으리라는 희망을 품어보면 그만 저만하게 버텨내 볼 만 합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달리다보면, 똑같은 실수를 또 하는 날이 오거나, 지금까지 확신에 차서 반복했던 조리법이 틀렸다는 것을 알음알음 소문을 통해 알게되는 날이 옵니다. 내 자신이 원망스럽고 싫어지지요. 3.6.9의 고비 중 6개월 정도의 시점에 찾아오는 산인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배울 일이 많으니, 스스로를 달래가며 할 수 있는 일들을 또 해내며 시간을 달래봅니다.
어느 정도 이집 부엌의 구조나, 굵직한 전통과 문화는 익숙해졌다고 생각이 들 무렵이 되면, 가혹한 시집살이가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밉니다. 살면서 해본적도 없는 닭백숙이나, 구절판 같은 요리를 갑자기 뚝딱,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라합니다. 당황한 기색은 숨기고 당연히 할 수 있다는 표정을 지어냅니다. 이쯤이면 두려움을 내색한다는 것이 약점으로 지목되어 이내 공격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저에게는 이번 출장이 그랬습니다. 살면서 한번도 먹어본 적도 없는 프렌치 코스 요리를 익숙한 듯이 뚝딱 해내야 하는 그런 숙제. 잠깐, 날짜를 세어보니 9개월 째가 되는 달이네요. 물론 혹평도 감수해야 하겠지만, 불편한 민낯을 또 만나게될지도 모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번 요리를 통해 생전 사용해보지 않았던 월계수잎이나, 시즈닝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게되는 쉐프로 내공을 한층 더 쌓아 올리게 되겠지요. 그렇게 또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해가며, 오늘을, 내일을 버텨봅니다.
그리고 이직을 바라는 친구들에게 오늘도 말합니다.
어느 직장이나 어려운 것은 다 같다고. 그러니 텃새라도 부릴 수 있는 친정집에 꼬옥- 붙어 있으라고.
어쩌다보니 나의 사랑해 마지 않던 파리는 에어컨 없는 한여름의 독방 같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