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이 지나고서야 꺼내보는 이야기
첫회사는 재직 당시 5천억, 세 번째 회사는 1.8조 원 규모의 대기업이었다. 두 번째 회사는 외국계로 한국 지사 매출만 400억이었고, 전 세계에 입점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 큰 기업이었다. 3번의 조직에서 나는 늘 KPI를 초과 달성하는 사람이었고, 높은 고과를 놓쳐 본 적이 없으며, '일 잘하는 애'로 늘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스타트업에 온 지 1년 반. A스타트업에서 6개월, B스타트업에서 1년. 그 짧은 새에 2개의 회사를 경험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어느 회사에서나, 적응하는 기간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헤맨다는 느낌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어딘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도 없이, 어색하고 낯선 경험이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을 남기려 노력(은) 해봤다
먼저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점은,
둘 다 좋은 회사다. 특히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회사의 규모에 비해 직원 복지도 정말 많이 신경 쓰는 편이고, 실리콘밸리가 아닌 한국 기업에서 소위 성과만 생각해서는 흔히 할 수 없는 결정들을 소신 있게 밀어붙이는 훌륭한 C레벨들이 계시며, 그만큼 꾸준히 고속 성장을 하고 있는 회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는 걸 몰랐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은 뿌리부터 다른 점이 많았다. 스타트업에서 당연한 것들이, 대기업 출신인 나에게는 다시 태어나야 하는 수준의 변화와 적응이 필요한 일이었다. (10년 차에 새로 시작이라니, 저런) 무엇보다도 간절했던 점은, 적응의 과정을 미러링 할 선배의 존재였다. 멘토까지는 바란 적도 없었다. 조직이 작으니 절대적으로 나와 비슷한 경험과 어려움을 가진 사람을 만날 확률도 낮게 마련이다.
1.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기준
대기업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기대보다 잘하는 사람. 협업에 (탁월하게 잘할 필요도 없었다) 무리가 없는 사람. 적절한 타이밍에 보고를 잘하고, 적절한 담당자를 인볼브 시킬 줄 아는 사람. 정도면 조직 생활하는데 무리가 없었고, 그 수준에서 부가 가치(새로운 아이디어 정도)를 제안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 정도면 어렵지 않게 일 잘한다 소리를 들었다. 물론 꼭 일 잘한다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작은 스타트업일수록 내가 하는 일의 성과가 회사의 성과로 결부되어, 생사를 함께하는 느낌과 그에 상응하는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일을 잘하고 있는건가? 라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늘 하게 되는데, 스타트업에서는 일잘한다라는 기준에 대중이 없었다. 1년 사이 매니저가 3번째 바뀌는 동안,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모두 달랐다.
2. 동료, 그리고 협업 (feat. 기업 문화)
스타트업이라는 특성상 사업 아이템이 새로울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근무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사람들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의 합의점을 찾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당연한 일이다) 그 시간 동안, 누군가는 실패하고, 망하고, 상처를 주고받고, 깨져가며 (이것도 당연한 일) 모두가 함께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을 바탕으로 조직이 '성장'한다. 그 지루한 시간 동안, 실패를 직접 경험한 당사자가 내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그런 우여곡절과 히스토리를 모두 겪고도 살아남으려면, 동료들과 (치고받고 싸울 때 싸우더라도) 깊은 신뢰와 동료애를 쌓아두어야 한다. 좋은 사람이면서, 일을 잘하는 사람이면서, 성과를 위해 열정을 쏟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사이의 밸런스... 너무 어렵다. 말을 아끼게 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가 아니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3. 적응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약간의 아마추어리즘,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선 밀어붙이기로 결정하고 마음먹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상품을 개발하고 마케팅을 하는 일은 완성도를 높이고 대안을 찾는 일은, 계속하려고 마음먹으면 평생도 할 수 있다. 런칭 일정이 지연된다는 말이다. 뭐라도 시작해놓고 보완하고 개선하는데 익숙해져야 하고, 내가 원할 때 필요한 자원을 척척 공급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일에 적응해야 한다. 역시 어려운 일이다.
4. 대기업 출신에게 유독 더 어려운 일인 이유
대기업에 다니는 동안에는 내가 안전한 울타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대기업에서도 늘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역할로 스타트업처럼 일해왔다며 스스로 의기양양했다) 역시 착각이다. 최고급 안전성을 자랑하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거리와 안전을 지켜주도록 세뇌를 받은 사람들과 지금껏 지내왔다는 것을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았다. 그땐 내 일은 내 일이고, 니 일은 니 일이었으니까. 내가 맡은 영역 내에서, 나의 성취를 위해서 일하면 그게 곧 조직의 성과로 이어졌다. 스타트업에서 같은 접근으로 내가 내달리는 일이 누군가의 모티베이션을 저하시키는 일이 되고, 그것이 나에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비하지도 못했다. 스타트업에서는 모든 일의 경계가 희미하다. 그 희미한 영역에서 시너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5. 관리자 관점으로 시야를 돌려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에 있을 때는 조직에는 늘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고, 업무는 분업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떤 특성의 사람이든, 맞는 자리를 찾아서 배치하면 그만이었다. 그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을, 굳이 애를 써가며 변화시킬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 사람이 유기적으로 여러 사람과 자기만의 노하우를 활용해 일당백을 해야 하는 스타트업에서는 이 사람이 조직생활에 대한 핏이 맞지 않고, 기존 구성원들과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기면 피해 가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도 가고 싶다면,
새하얀 도화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기존 체제와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들을 모시고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노력이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겸손한 마음으로 적어도 6개월은 보내시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두 손을 모아 말씀드리고 싶다.
그런데도 어째서 계속 다니냐고 묻는다면
지금 그만두면 지난 1년의 경험은 실패한 경험이 된다. 하지만 극복하고 신뢰를 다시 쌓아서, 실제 성과로 연결해 내고 나면, 큰 성과 속에서의 작은 해프닝으로 전환할 수 있다. (내 인생 속에 큰 실패의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낮은 마음으로 눈 앞에 보이는 것들부터 직접 나서서 해결하며, 속도조절을 해가며 차근챠근 1cm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10월 말에 큰 프로젝트들의 런칭을 앞두고 있다. 성과를 내서 비로소 웃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볼일이지만, 어두운 터널 속에서는 빛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 무슨 도리가 있을까.
쓰고 보니, 내 브런치답지 않게 시니컬한 글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스타트업 대표인 친구들을 만나면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처음 오는 사람은 뽑지 말라고 내 입으로 이야기한다. 그 사람의 잘못도, 조직의 잘못도 아닌데, 그저 너무 다른 배경 때문에 서로 힘들어지는 일이 적지 않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의 이동에서 '스타트업 스피릿으로 무장한 열정과 희망'만으로 생존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기록으로 남기며, 이 글을 읽으며 나 스스로가 늘 겸손할 수 있기를, 누군가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기를.
그리고 다음 포스팅부터는 다시, 어려운 상황일 때 스스로 동기부여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