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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May 03. 2020

죽음도 지울 수 없던 편견

'그런 피'에 대해.

예원이 죽은 지 일 년 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 나는 지금 진흙탕에 빠진 기분이라고.” 엄마는 깊은 절망과 슬픔을 호소하는듯 했다. 엄마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화를 내도 슬퍼하는 건 본적이 없다. 엄마가 울지 않는 다는 건 아직 내가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상징적 보루가 쓰러졌다. 


엄마도, 무너져있는 엄마를 보는 나도 함께 울었다. 


고1, 새 학기의 설렘이 가득한 봄. 종례가 끝나면 친구들은 모여서 수다를 떨다가 집에 갔다. 나는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아직 아무도 하교하지 않은 학교 담장 옆길을 달릴 때면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늦둥이 동생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는 건 내 새로운 일과이자 은근한 자랑거리였다. 


17년을 외동으로 살다가 갑자기 맏언니가 됐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부담이었다. 


동생은 어느새 혼자 서고 말을 했다. 유치원도 갔다. 대학생이 된 나는 강의가 없는 날이면 동생을 데리러가기도 했다. 그러면 동생은 유치원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면서부터 “언니!”하고 손을 흔들었다. 


동생이 아빠 핸드폰에 그려둔 그림. 6살 치곤 꽤 그린다. 


엄마대신 온 언니를 보고 실망한 표정이 잠시 스쳤지만, 친구들에게“우리 언니야”하고 꼭 자랑하곤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놀아주지 않은 게 미안해서 괜히 “언니가 좋아? 왜?”라고 물으면 꼭 “응 좋아! 가족이잖아.”라고 답해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였다.


장례 이후 엄마는 안부인사차 여기저기 전화를 많이 걸었다. 엄마는 수화기에다 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어느 날 엄마가 씩씩대며 말했다. 앞으로 영숙이랑 전화 안 할 거라고. 엄마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영숙이 아줌마는 엄마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걔는 엄마아빠가 그래서 그런지, 좀 사랑을 원하는 듯이 알랑알랑 댔잖아. 피는 못속이나봐.” 


동생은 입양아였다. 


엄마는 불같이 화냈다. 동생을 가까이서 보던 아줌마인데. 평소 예원을 얼마나 예뻐하고 챙겼는데. 그런 아줌마도 입양에 대한 편견은 지우지 못했던 거다.


입양 가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그렇다. 아이를 품은 부모의 희생은 고결한 양 높인다. 입양아를 구분 지을 수 있는 못말리는 특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문제아를 거둔 가족들이 성자고 희생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문제를 일으킬 아이처럼 대한다. 


동생의 알랑대는 성격은 어느새 '애정결핍' 또는 '제 엄마를 닮아 벌써부터 남자를 유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고작 6살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동생이 없어지자 정말로 우리 가족의 주변 사람들은 엄마를 대단한 사람처럼 치켜세웠다. 입양을 하다니 대단하다며 건네던 인삿말이 이렇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줄은 몰랐다. 곧 문제아가 되는, '그 피'가 흐르는 입양아. 그의 흠결마저 덮어준 거라며 일방적인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고생했단 말도 꼭 덧붙였다. 


사실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 뒤에 고맙다는 말을 더 많이 붙였다. 동생이 얼마나 예뻤고 특별한 아이었는지 순간순간을 곱씹으며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면서 무너진 마음을 조금씩 쌓아 올렸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엄마는 동생의 기억이 아득하고 따뜻하다고 말한다. 동생이 남긴 추억은 지금도 엄마를 치유하고 있다. 


그러니 '그런 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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