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all started from..
이번 글은, 나를 오랫동안 괴롭힌 어떤 두려움에 대한 글이다. 특히 결혼을 생각할 때, 혹은 결혼하지 않은 내 미래를 떠올렸을 때 항상 바탕이 되는 이 두려움. 그 원천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말 못 했는데... 나 남자 친구 있어. 일 년 됐어"
몇 년 전 가장 친한 친구가 고백하던 순간이었다. 취업준비를 하는 내게 누가 될까 말을 못 했단다. 입안 가득 들이킨 버블티의 버블들을 채 씹지 못하고 콜록댔다. 배신감. 매일 카톡으로 모든 일상을 나누면서, 우린 학교도 같이 다니고 한 달에 몇 번이고 만나면서도 모든 이야기를 다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중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숨겨왔다고? 누가 되긴 뭐가 누가돼! 지금 이렇게 폭탄선언하는 게 누야. 대체 왜 말을 안 한 거야. 날 못 믿는 건가. 이런 생각이 서운함이 삐죽삐죽 삐져나오려 할 때 다음 감정이 찾아왔다. '두려움'이었다. 세상에서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1년간 나를 넘어서는 단짝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난 네가 여전히 가장 친한 친구인데. 넌 아닐 수도 있겠다. 두렵다. 섣불리 서운함이란 감정을 너무 많이 비쳤다간 서로 감정이 상할 것이고 단짝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 그렇구나"
내가 벌벌 떨며 꺼내 든 카드는 두려움을 잘 포장한 이해였다. 사실 이런 큰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서운하고 화가 났다. 그렇지만 이해해야 했다. 서운하지 않은 척해야 했다. 그 남자 친구 놈을 이겨 단짝으로서의 내 명예회복을 해야 하기에. 최대한 내 방식대로 서운함을 드러내긴 했다만, 그래도 억누른 감정이 크다.
위의 이야기는 내 인생에 반복되는 레퍼토리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 모두 마찬가지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내 친구가 다른 친구를 더 자주 만나는 것 같아 신경 쓰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아 ~ 저번에 전시회 같이 갔던 그 친구?" 하면서 떠본다. 바로 다른 주제로 돌려 별 관심 없다는 뉘앙스까지 주는 고도의 스킬이다. 역시나 원래 친하게 지냈던 또 다른 고등학교 동창이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온갖 감각을 동원해 동향을 추적한다. 음. 인스타그램에 태그 된 걸 보니. 그 친구 맞네. 이런 식이랄까. (이쯤 돼서 묻는 질문 나만 이래? 그렇다면.. 병원에 가보진 않겠다. 누구나 음침하고 이상한 구석이 조금씩은 있잖아요!)
내가 굳건히 지켜온 단짝의 지위에 대해 고심하던 어느 날이었다. 인간 영감의 원천 샤워를 하던 중,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 정말 쓱 지나가는 이미지였다. 바로,
피구 공과 커다란 체육관
친구가 나보다 더 친한 사람이 있다고 선언했을 때 느낀 것과 같은 종류의 두려움을 느꼈다. 기억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난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사이, 캐나다로 유학을 다녀왔다. 밴쿠버 근교 시골 도시의 내가 다니던 중학교, 그곳의 체육관. 다소 형식적이던 K-체육시간과 다르게 꽤 힘들었던 PE(Physical Education, 체육시간을 이렇게 부르더라) 시간이다. 선생님은 중학생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말랑말랑한 공으로 하는 피구 게임인 닷지볼(dodge ball)을 시켜주곤 했다. 같은 반 남자애가 던진 공에 얼굴을 정면으로 맞은 후로 난 닷지볼이 싫었다.
사실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매 경기 전, '짝'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항상 두 명씩 짝을 짓게 한 다음 토스 연습을 시키고, 한 팀이 돼 경기를 시키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사춘기 뜨내기 유학생에게 살갑게 다가와 주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한 시간 동안 단 둘이 나와 짝이 되기로 나설 만큼 친한 친구는 없었다. (게다가 유일한 한국인 친구는 공교롭게도 다른 반이었다! 제길) 그래서 나는 매번 나와 같은 처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안드레아스와 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우리 둘 중 그 누구의 의지도 아니었다. 이방인 둘이 눈알을 굴리며 쭈뼛대고 있으면 선생님이 "둘이 하면 되겠다!" 하고 말해주신다. 그럼 짝이 되는 거였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