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그림을 자주 접했다. 엄마 아빠가 그림을 그렸고 큰아빠가 그림을 그렸고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렸다. 산속에 있는 할아버지의 작업실에 가서 먹고 자며 아기 때부터 붓을 잡고 놀았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돌잡이 상에서 붓을 잡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렸으나 아이에게는 한 번도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에 관한 것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종이와 연필, 붓만 가지고 자유롭게 그리게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여전히 선으로 사물을 표현하기보다 면으로 칠하는 것을 선호한다. 일단은 칠하고 본다. 채색하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아버님의 드로잉 작업이 떠오르기도 하고 남편의 추상 작업이 생각나기도 한다. 물론 아기 때부터 봐온 아버님과 남편의 작업들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아이는 확실히 칠하는 걸 좋아한다. 다른 아이들의 미술 작업을 비교해 보면 더 분명해진다.
내가 생각하는 미술 놀이는 말 그대로 놀이이기 때문에 정해진 규칙이 없다. 스케치하든 칠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고 아이 성향을 알 수 있고 그걸 토대로 기존의 방향에서 더하거나 다른 방법을 시도할 수 있게 이끌어 줄 수는 있다.
현재로서는 아이에게 사물을 똑같이 그리거나 구상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다. 그건 크면서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방법이고 굳이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따라올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표현을 조금 더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얼마 전에 아이의 친구 엄마가 아이의 그림을 봐달라기에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 구상 능력이 탁월하고 확실히 또래들에 비해 스케치를 잘했다. 다만 색에 대한 표현이 거의 없었는데 이 부분도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아 재능이 있으니 꼭 미술을 배워보면 좋겠다고 권했다.
다른 표현 방법을 알게 되면 아이는 세상을 보는 시각도 넓어질 테다. 소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어쩌면 보이는 만큼, 표현하는 만큼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되도록 많이 표현했으면 한다. 가장 순수하고 자유로운 시각일 때 많이 표현했으면 한다. 이 시기가 아니라면 영영 표현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영어유치원이 유행이라지만 아이들이 영어보다 먼저 미술을 접했으면 한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어릴 때 미술놀이를 하는 건 어떤 놀이보다 값지다. 늘 추천하는 미술놀이. 부담 없이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만 꺼내줘도 제멋대로 표현하는 아이들이다.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필 받은 날에는 붓과 종이를 꺼내 만족할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일곱 장을 채우고 나서야 붓을 내려놓는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데도 이미 대가다. 어른들은 다시 아이처럼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걸 보고 있자면 아이들이 참 부럽다. 아이들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흉내 내거나 따라 할 수 없고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그런 것들. 아이들은 모두가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그런 것들이 잘 유지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가끔은 아주 소수이긴 해도 어떤 어른들에게서 그런 면을 볼 때가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만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내 주변인은 모두 아이 같은 면이 있다. 조금 비현실적이긴 해도 재미있다. 내가 처음 선용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도 선용의 아이 같은 어떤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현실이 꼭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비현실적인 것들에서 현실이 나오기도 하고 모두가 현실을 생각할 때 누군가는 비현실적인 것들을 상상하고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그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회에는 예술과 예술가들이 필요하다. 아이가 예술가가 된다 해도 매우 환영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예술적인 삶과 가치관, 자세 등은 꼭 배웠으면 좋겠다. 그런 가치관과 정신이 결국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에.
사실 어떤 분야라도 예술적 정신으로 다가가면 놀랄 만큼 큰 발전과 성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이 그랬고 스필버그가 그랬고 잡스가 그랬고. 세상에 수많은 존경받는 사람들은 다 예술가다. 하는 일이 달랐을 뿐, 생각하는 방식이 영락없는 예술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