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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Oct 05. 2021

옳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입사 전 마지막으로 본 면접. 그리고 그 면접의 마지막 질문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다지 특별하지도, 흔하지 않은 질문도 아니었는데 나를 인터뷰했던 면접관의 발언과 태도에서 굉장히 진한 진정성이 느껴져서 어쩐지 그때가 잘 잊히지 않는 것 같다. 면접관이 던진 질문은 ‘본인의 매니저 혹은 다른 동료가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요청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답을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3초간 답변을 머뭇거렸다. 면접 경력이 너무 많이 쌓여서였을까. ‘한국에 있는 회사에서 의례 기대할 만한 답'을 나도 모르게 고민해버렸다.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겠다는 식, 혹은 상사가 시키면 이유가 있을 테니 물어보겠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오답들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그런 일은 생긴다면 이유는 물어보겠지만 어쨌든 거절할 것이며, 계속 요청이 있다면 다른 상사나 HR의 조언을 방법을 택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면접관은 ‘정답입니다. 고민할 필요 없이 거절하는 것이 맞습니다.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스스로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회사는 이슈 제기를 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채널을 잘 구비하고 있으니 입사 후에 꼭 한 번 살펴보기 바랍니다.'라고 답변해 주었다. 나는 그때 그냥 그 말이 정말 말뿐인 대답이라 할 지라도 어쩐지 무척 안심이 되었다.  


면접에서 잠시 머뭇거렸던 것과는 달리 나는 문제가 있을 때 그냥 잘 넘어가지 못하는 편이다. 굉장히 겁이 많으면서도 좀 이상한 고집 같은 게 있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그런 적이 있었다. 20명이 조금 넘는 팀원 전체가 다른 나라에 콘퍼런스를 참석 차 출장을 가야 하는데 상무가 당시 팀 막내였던 내게 단체 비행기 티켓을 끊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사이트를 비교하며 가격을 알아보는 와중에 그가 자신이 잘 아는 여행사가 있는데 그 업체를 통해서 단체 발권을 하면 저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서서 리서치를 해보니, 기존에 견적을 받았던 사이트보다 업체의 항공권이 더 비싼 데다, 단체 발권이 개인 발권보다 특별히 저렴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상무에게 단체 발권 대신 직원들이 특정 예산안에서 개별적으로 발권하여 비용 처리하도록 안내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발언은 그와 나 사이에 아주 큰 갈등의 불꽃이 되었다. 그날 이후 몇 차례 나는 그에게 불려 가 ‘네가 그렇게 말하면 여행사를 소개해준 내가 마치 커미션이라도 먹으려고 비싼데도 소개해준 꼴이 되지 않냐', ‘너는 언제부터 그렇게 싹수가 없었냐'라는 꾸중을 듣다, 결국 ‘가격이 좀 비싸도 직원들이 각자 발권하느라 들이는 수고도 덜고, 같이 한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팀 빌딩도 할 수 있고, 국적기라 서비스도 좋다는 점을 내가 다 고려하고 소개해 준 것이니 그냥 단체 발권을 해라'라고 강요를 받았다. 그가 제시한 이유들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라 이 정도면 군말 없이 진행했으면 됐을 텐데, 나는 굳이 팀 전체 미팅에서 팀원들이 선호하는 방법을 묻고는 다수결에 따라 개별 발권을 하는 것으로 일을 진행해 버렸고 그 이후로 완전히 그의 눈 밖에 나 버렸다. 그가 여행사와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그 일이 있은 2년 후에 회사 돈 횡령으로 해고를 당하는 끝을 맞이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회사에서 리더십의 도덕심이나 투명성에 대해 한 번도 신뢰를 갖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려 별 것도 아닐 수 있는 항공권 하나도 리더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게 아닐까. (사실 볼펜 값 하나, 화장실 휴지 사용 하나에도 '원가 절감'을 외치던 짜디짠 회사인지라 추후 괜히 문제가 될까 염려된 탓도 있었다.)


내가 입사한 2018년은 지금 회사에 그리 좋은 해는 아니었다. 그 해는 회사가 태어난 지 20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창립 후  가장 큰 스캔들이 터진 해이기도 했다. 높은 임원 하나가 성추행으로 인해 퇴사를 당하면서 회사가 이를 은폐하고 큰 퇴직금까지 챙겨줬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가 나간 뒤 수천 명의 직원들이 직장 내 성추행과 이를 옹호한 회사 측 대응에 항의하기 위해 파업을 벌인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외부에서 회사를 바라보는 이미지도 많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실망하고 또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은 ‘다양성과 포용' 믿고 실천해온 직원들이었다. 파업이 시작된 날이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출근하는 날이었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회사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걸까? 모두 환상이었을까? 역시 회사 규모가 너무 커지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건 필연적인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회사와 리더십의 문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슈를 다루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 11월 1일 이후 한 달이 넘도록 회사 리더십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벌인 노력과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나는 한 번 더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물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무슨 소용이냐는 목소리, 그리고 여전히 보복성 인사가 두려워 직속 매니저와의 문제는 밖으로 꺼내놓기 어렵다는 한계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크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일이 있은 후 리더십은 ‘상처를 줘서 송구스럽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식의 두리뭉실한 정치인식 사과를 내놓지도. 문제를 축소하거나 계속 파업을 행하는 직원들에게 경고를 하는 등 내가 이전의 회사에서 줄곧 봐왔던 리더십의 태도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매우 상세하게 사건의 경위를 밝히고, 앞으로 회사가 실천할 액션 아이템을 내부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유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모든 히스토리와 액션 아이템은 내부 사이트에서 빠짐없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후속 조치들이 앞으로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100% 방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차별받을 것이고, 누군가는 권력을 남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회사에서는 이런 차별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있기에, 나 같은 직원들이 마음 끄트머리에 남은 신뢰와 기대를 놓지 않을 수 있다. 


이곳에 입사 한 이후에도 사내 작은 차별 문제에 대해 이슈 제기를 한 적이 있다. 처음부터 아무런 걱정 없이 바로 액션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는 양쪽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봐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계속 보고를 주저하게 되었고 매니저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문제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많이 긴장했고 긴장감이 온몸의 떨림으로 표출되었다. 매니저는 어렵사리 꺼내놓은 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끊지 않고 다 들어주었고 가장 먼저 ‘이 이야기를 나에게 먼저 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예상치 못한 그 한마디의 말이 그간의 마음고생을 다 누그러뜨리는 것 같았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아도 리더에게 터놓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 인사팀에서 내가 제기한 문제를 자세히 조사하고,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계속 공유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 큰 힘이다. 설사 보복성 인사를 당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리스크를 안고 다른 직원들을 위해 그리고 회사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 같은 직원이 백에 한 명만 있어도 아주 조금은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아, 변화가 아니라면 기대하는 회사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남편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되도록 나서지 말라고 당부한다. 직원이 이야기를 해봤자 회사는 바뀌는 것이 없다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네이버 상사의 갑질과 직원의 자살 같은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냐고. 다행히, 아직 내 주변에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혹시 네가 그 문제를 보고한다면, 나도 같이 힘을 실어줄게'라는 동료들이 있어서 남편의 말에 기죽지 않을 수 있다. 


여담이지만 가끔 동료들끼리 편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누군가 조금 선을 넘는다거나 위험한 발언을 할 것 같은 눈치가 보이면 먼저 사내 이슈 제기 플랫폼의 이름을 언급하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서로를 조심시키고 교육시킨다. 너, 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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