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래 Jan 14. 2023

2019년 2월에 가둔 너

이제 풀어줄게.

2019년 2월에 쓴 글이 브런치 저장글에 갇혀있었다.

모두 풀어주고 2023년을 본격적으로 맞이해 본다.




글을 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내면의 손가락질이 괴롭힐 때가 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 네 인생은 너무 평평하잖아.'

'적어도 30대는 되어야 뭔가 할 말이 있지 않겠어?'

'넌 어제 본 영화도 뭔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 하잖아. 누가 네 글을 읽어주겠어.'


그러다 최근 책에서 이 문장을 봤다.

"나는 셰익스피어에 상응하는 책을 쓰지는 못해도 나에 대한 책 한 권은 쓸 수 있다."

아아, 이래서 사람들이 책을 읽으라 하는 걸까.


2019. 02. 27




친구들이 내게 주는 관심은 내가 그들에게 주는 것보다 적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번 호감도를 체크하고, 우정 포인트를 모았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일 궁금해했다.

나에게 의지해주길 언제나 바랐다.


아직도 예전 같은 생각을 한다.

1이 사라지고도 답장이 없는 것이 신경 쓰이곤 한다.

먼저 연락하는 것이 망설여질 때도 있다.


그러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에 의지하기로 했다.

나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나와주는 친구들의 의지에 감사하기로 했다.

1년에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내가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2019. 02. 26




대학생 때,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고1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죽어라 공부하고 여행 다니고 싶었다.


직장인 때, 일이 적성에 안 맞아서 대학생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마지막 퍼즐조각을 찾은 듯한 일을 구하고 싶었다.


출산 후, 남편과 신혼 생활을 못 즐긴 것 같아서 연애할 때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맨날 누워서 드라마나 보지 말고, 액티비티 한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미래에서 돌아와 다시 즐기는 것처럼 산다.


2019. 02. 25




아이가 아프다.

이번에는 39.3도에서 몇 시간을 내려가질 않는다.

딱히 원인을 모르겠는 불안한 현실이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끓인다.


내가 어제 많이 화를 내서 스트레스받은 탓일까.

내가 어제 안 좋은 음식을 먹인 적이 있었나.

내가 등원할 때 옷을 더 따뜻하게 입혔어야 했나.

내가 배변 훈련 때 더 씻기지 않아서 감염이라도 된 걸까.


어떤 이유든 모든 게 내 탓이니까,

너는 그저 평소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줘, 제발.


2019. 02. 24




어제 모든 일정을 끝마치고 원인 모를 이유로,

꼬마 아가씨는 한 시간을 넘게 울고 또 울었다.


지나 보면 별일 아닐 텐데, 그 순간에는 어쩜 그리 티끌 같은 일에 활화산처럼 폭발하는지.

화를 다 쏟아놓고 진정해 봐야 이미 아이에게 준 상처는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을, 그땐 왜 모른 체하는지.

얼마나 더 강해져야 이 울음소리에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보듬어주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

내 작고 보잘것없는 그릇이 산산조각 나, 아프게 베어 온다.


작게 쌔근거리는 아이의 숨소리에 맞추어 마음을 달래 보지만,

통 진정되지 않는 것을 보니

내 마음도 마치 아이의 어제와 닮았다.




당신이 밖에서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활짝 웃으며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묻고 싶은데,


나는 안에서 아이를 보고 더러운 부분을 닦고,

잠들 때까지 끝나지 않는 일을 하느라

구름 낀 표정으로 내 불만만 늘어놓는다.


너의 휴게소가 되고 싶은 마음보다

짐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더 큰 나를 위해,

오면서 마트에 들러 사 온 음료수를 건네며

너는 두 번째 일터에서 팔을 걷어붙인다.


2019. 02. 22




살짝 포근해졌을 뿐인데, 패딩은 거추장스럽고,

정해인 씨가 입은 코트는 남편에게 속삭인다.

"이걸 입으면 더 멋있어질걸?"


뱃속의 둘째가 자라면서 몸이 무거워지는 나는

쾌청한 어린이집 위에 떠있는 하늘을 보며

캠핑 가서 구워 먹는 가리비와 바비큐를 구름에 올려 본다.


우리 딸은 무슨 생각을 할까.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 때리던데.

너는 왠지 구름에 뽀로로 비타민과 초콜릿을 올려놓을 것 같다.


점점 새로운 계절로 접어든다.


2019. 02. 28



ⓒ Alban MartelUnsplash

작가의 이전글 기억을 먹는 뇌, 뇌를 먹는 두려움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